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황해대교를 보면서

  • 날짜
    2005-05-10 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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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4
정화(鄭和, 1371-1435)는 명나라 세 번째 황제인 영락제(榮樂帝)의 명을 받아 1405년 62척으로 구성된 선단과 2만 7천여 명의 인원으로 33년간 일곱 차례나 항해하면서 남아시아, 아프리카, 호주, 미국 등 인류 사상 세계를 최초로 일주한 중국의 제독이다. 그토록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거세된 이슬람(색목인)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심부름꾼이요, 인격을 부정당한 존재였다.

그런 까닭에 정화에 대한 세세한 사료가 부족한 상태이며 역사적으로도 별로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 근래 중국 당국은 정화의 고향인 곤명시 진녕현 곤양진 월산(琨明市 晋寧縣 昆陽鎭 月山)에 정화공원을 정하고 그 안에 기념관을 세우고, 조상묘 및 강택민 주석을 비롯해서 유명인사가 정화를 기리는 휘호를 비석에 새겨 비림(碑林)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정화의 우람한 석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을 돌아본 사람들은 중국이 영락제 이후 청나라 말기까지 500년간 바다를 멀리하여 아편전쟁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100여 년간 외세에 의하여 나라가 찢기고 분열되고 점령당한 아픔을 바다로 열리는 세계로 치유하겠다는 숨은 뜻을 느꼈으리라.

새해부터 인천 앞바다에 모든 사람이 내다보이는 큰 다리가 건설된다. 60년간 죽었던 황해가 개성공단과 함께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라고 기원하면서 말이다. 제2연육교 교각폭 확장 운동으로 시민의 품에 들어온 이 다리의 이름을 뭐라 부르면 좋을까! 인천대교, 월미대교, 팔미대교 다 좋은 이름이다. 그러나 또 하나 황해대교가 있다.

황해는 우리의 조상인 발해(渤海)로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삶의 터전이요. 인천의 앞바다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땅이 크고 인구가 많아 내륙에서 혼란을 거듭하여 남아시아로 많은 이민을 배출했지만 동아시아의 지중해(地中海)인 황해를 넘보지 못했다. 황해는 오직 조선술이 뛰어났던 우리 조상이 경영하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과 수교한 1992년 그후 10여년에 불과한데 인천국제공항에서 중국직항로가 25개 노선으로 증가됐고, 9개의 해로(海路)가 생겼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황해가 빠른 속도로 떠오른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우리는 중국과 역사전쟁이란 말이 오갈 만큼 긴박했던 순간을 맞이했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를 선점하려 시도하고 있는데, 우리는 도로 이름만 하더라도 황해고속도로가 아닌 서해안고속도로 멀리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바닷가에 머물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중국은 무덤도 정확하지 않은 500년 전의 정화를 살려내어 세계로 비약하는데 우리는 조상의 넋이 깃든 황해에 왜 뛰어들지 못하는지 답답하다. 황해는 중국 영해(領海), 서해(西海)는 한국의 바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아직도 무성하다. 해방 60년이면 황해는 공해(公海)일뿐 중국의 바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라고 생각한다.

황해가 중요한 이유는, 인천은 인천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천이 인천을 넘어 황해를 경영하여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통일의 첩경이기도 하다.(225회 아침대화에서 이윤성 의원이 제기한 인천 앞 바다 다리의 이름에 관한 답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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