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아시아번영의 갈림길, 토지개혁과 죽산 조봉암

  • 날짜
    2017-08-23 10: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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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래 발간된 조 스터드웰(Joe Studwell)이 쓴 `아시아의 힘(How Asia Works: Success and Failure in the World`s Most Dynamic Region)`이란 책을 읽고 그 내용이 좋아서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다. 아시아 및 중국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과 현장을 기초로 풍부한 역사자료를 동원해 집필된 책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정보혁명을 이끌었던 빌 게이츠(Bill Gates)는 `어떻게 한국, 일본, 대만, 중국 같은 나라는 지속적이고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고 개발에 성공했을까? 왜 다른 나라들은 그렇게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까?`라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책을 통해 얻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 책을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동아시아에서 승자와 패자를 결정한 것은 전후 해방을 맞이한 초기에 토지개혁에 성공한 국가와 실패한 국가의 차이에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일본의 패망 이후 장제스와의 내전(內戰) 중에도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발 빠르게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1949년 10월1일 마오쩌둥이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 가장 먼저 한 것이 토지개혁이었다. 그 결과 인구의 80%가 넘는 농민의 절대적인 환호가 천지를 울렸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북한도 토지개혁에 나서 1954년 집산화(집단농장)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중국과 북한은 농민들로부터 상당한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전후부터 현재까지 동아시아에서 우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은 토지개혁을 통한 공산주의의 도전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주공산(無主空山)의 넓은 땅을 선점하는 사람이 소유권을 차지하는 미국의 서부 개척사가 보여주듯 타인의 재산을 국가가 환수해 재분배한다는 것은 비미국적(非美國的)인 일이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토지개혁에 대해 미국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1945년 무렵에는 토지개혁에 의한 토지재분배가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는커녕 관련된 이론도 없었으니 더욱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진보적인 대외정책 전문가들은 아시아 사회에 공정성을 부여하고 이제 막 시작된 냉전적 국제정세 속에서 부상하는 공산주의의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토지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용감한 소수`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돋보이는 사람은 울프 라데진스키(Wolf Ladejinsky, 1899~1975)인데 아시아 농업문제에 대해서 미국 정부에 조언을 가장 많이 한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1899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러시아 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탈출한 라데진스키는 회고록에서 `나는 1921년 초 러시아를 떠나기 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 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되었다. 러시아 공산당이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돌려주는데 실패했다면 볼셰비키는 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었다. 또한, 제정 러시아가 일찍이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라데진스키는 중국의 내전 이전에 장제스와 워싱턴 정부에 토지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제정 러시아와 같은 비극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고, 그 예측은 적중했다. 이후 일본에 파견된 라데진스키는 맥아더 사령관을 설득했다. 일본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토지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결과 1차, 2차 토지개혁법이 통과되기까지 맥아더가 일본 정부에 지시한 토지개혁의 내용은 중국공산당이 1947년에 발표한 토지법 서문과 대동소이하다. `경제적 난관을 제거하여 민주적 추세를 부활 및 강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확고히 내세우며 수 세기 동안 농민들을 봉건적 억압에 시달리게 만든 경제적 구속을 철폐하기 위해 일본 황실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노동의 결실을 누릴 수 있도록 보다 평등한 기회를 얻게 만드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따라서 일본 황실 정부는 1946년 3월15일 전까지 농촌 토지개혁을 제출해야 한다.`

일본의 군벌, 재벌을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은 무리한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했다. 이들에게 반대하여 옥에 갇혔다가 일본이 패배한 뒤 자유를 얻은 사회주의와 양심세력이 자연스럽게 정당성을 획득했음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때 일본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토지개혁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토지개혁이 시행되자 일본의 소작인과 농부들은 눈에서 혁명의 열의가 사라졌고, 도리어 이런 결과가 초래되어 자신들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듯 절반쯤은 황송한 태도로 땅을 넘겨받았다. 일본에 민주주의가 그러했듯 토지개혁 역시 외부의 강제적 힘에 의한 것이었기에 이들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자신들에게는 그에 대한 책임이 없고, 법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2년여에 걸친 토지개혁(1947~1948년) 과정에서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폭력사태가 110건이나 있었지만, 사망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대륙에서 토지개혁에 실패한 장제스의 대만 정부는 쫓겨난 일본인으로부터 압수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다가 미국 정부와 라데진스키의 권고를 받아들여 1953년에야 토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장제스 정부는 대만에 기득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 대다수가 농민인 상황에서 그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토지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1945년 일본의 식민통치가 끝날 무렵 한국의 토지 소유상황은 일본인들이 전체 토지의 약 5분의 1을 보유했으며 대다수 농민은 소작인이었다. 1928년 미 국무부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4% 미만의 가구가 전체 농경지의 55%를 소유하고 있어서 아시아 여러 나라 중에서도 토지 소유 불평등이 가장 심한 상황이었다.  
미국의 아서 러치소장은 1945년 9월부터 한국의 군정장관으로 부임했다. 러치 장관은 토지개혁에 관심이 없었다. 북한은 1946년 3월부터 토지개혁을 하여 민중의 지지가 높아진 데 반해 미 군정에 대한 반감은 높아졌다. 미 국무부는 1946년 가을에 토지개혁을 실행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있다가 귀국한 이승만과 러치 장관은 계속 이에 저항했다. 1947년 러치 장관이 사망하고 1948년 한국 정부가 수립되자 새로 선출된 국회에서 토지개혁법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법안의 통과에 불만을 가졌던 이승만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국회에서 기각되었다. 1949년 6월, 이승만은 어쩔 수 없이 토지개혁법안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토지개혁에 반대했던 것은 그의 지지기반이 토지를 소유한 지주를 비롯해 일제 이래로 기득권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회의원 중에도 지주 계층이 많았지만, 토지개혁 문제에서는 인촌 김성수를 비롯해 대의를 위해 원칙적이고 양보하는 태도를 취했다. 남한에서 토지개혁은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주일 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때까지도 개혁 작업을 머뭇거렸다. 전쟁 직후 부산을 비롯한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남한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은 대다수 지역에서 신속하게 농민위원회를 결성하고 100만여 가구에 50만㏊(1㏊는 3025평)가 넘는 땅을 무상으로 분배했다. 1950년 말 미군과 유엔군은 수복 지구에서 북한의 토지개혁을 불법으로 선언했다. 미국의 재촉을 받은 이승만은 뒤늦게 토지개혁 시행에 나섰고, 남한의 토지개혁은 1953년 말에 비로소 완료되었다.  

조 스터드웰의 `아시아의 힘`은 한국에서 토지개혁이 시행되고 거의 70여 년이 흐른 뒤에 여러 가지 사료들을 검토해 나온 글이자 한국과 무관한 미국의 역사학자가 쓴 글이란 점에서 비교적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토지개혁이 추진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는 동안 온몸이 죄어드는 듯했다. 나는 토지개혁이란 어렵고 힘든 과정에서 최선을 다한 당시 대한민국 국회와 제헌의회 의원들의 애국심과 노고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 출신이었던 죽산 조봉암 선생이 최초로 토지개혁 깃발을 내걸고 나아가 성공시키는 과정에서의 역할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다. 그가 6·25전쟁의 와중에 이미 민족의 평화통일 정책을 천하에 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긍지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2년 뒤인 2019년이면 죽산 선생의 탄생 120년, 서거 60년이 된다. 우리는 그분을 기리는 운동을 서서히 펼쳐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로마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벨레트리라는 인구 5만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은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곳이다. 지난 2014년 그의 서거 200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행사는 이탈리아 정부나 로마시가 아닌 자그마한 마을 벨레트리가 스스로 주도한 것이었다. 긍지 높은 문화와 역사를 가진 도시의 모습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깊이 느끼고 배워야 할 바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