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책임사회

  • 날짜
    2018-01-12 09: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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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이 한()나라를 세우고 12대에 이르자 4대에 걸쳐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참정했던 원제(元帝)의 외척(外戚)이자 황후의 조카였던 안한공(安漢公) 왕망(王莽, BC45~AD23)이 실권을 잡았다. 그는 평제를 독살한 뒤 다른 제후들이 있었음에도, 만약 그들이 황제가 된다면 자신이 실각할 것을 두려워하여 두 살짜리 유영(劉嬰)을 황태자로 세웠다. 왕망은 주()나라 때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필한 것을 본받아 유영을 유자(孺子)라 칭했으니 형식상 황제였을 뿐이었다. 그는 권모술수를 동원해 선양혁명(禪讓革命)을 끌어냈고, ()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한 고조 유방이 세웠던 한나라(BC202~AD8)210년 만에 운명을 다한다. 역사는 이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이라고 한다.

 

문제는 불과 14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왕망이 을 개국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첫째, 뿌리 깊은 외척 세력 왕 씨의 발호(跋扈)에 있었다. 왕 씨 문중은 당대에 제후를 9명이나 배출했으며 조정의 중신이나 자사(刺史), 군수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요직이 왕 씨 수중에 있었다.

 

둘째, 한나라의 후기 황제들은 나이가 어리거나 병약하여 정치를 모르는 황태후들의 막후정치가 혼란했고, 관료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는 극에 달했다. 한서(漢書)』 「포선전(鮑宣傳)에 보면 백성이 일곱 가지를 잃고 하나도 얻는 것이 없으며(民有七亡而無一得), 또 백성은 일곱 가지 죽을 일은 있어도 한 가지 살길은 없다(民有七死而無一生)라는 글이 보이는데, 이것이 당시 백성이 처한 삶의 실상이었다.

 

나라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더 이상 살 수 없어 떨쳐 일어나는데, 그들 가운데 녹림군(綠林軍)이 돋보였다. 이들은 성곽을 공격하거나 토지를 빼앗을 생각은 하지 않았으며 기근이 지나고 세월이 좋아지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적미군(赤眉軍) 또한 녹림군처럼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분기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적군과 구별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눈썹을 칠했는데 이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외에도 수많은 군소 농민 반란이 일어났지만, 40만에 이르는 관군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이들 중에 유수(劉秀, AD6~AD57)가 있었다. 한나라의 귀족 집안 출신이라고 하지만 농민기의군(農民起義軍)에 가담한 평민이었을 것이 확실하다. 한나라 황족과 성씨(姓氏)가 같은 유 씨일 뿐이었다. 그러나 인물이 출중하고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지략과 용기가 있어 누구도 승리할 수 없다고 여겼던 곤양(昆陽, 지금의 하남성 엽현)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왕망의 군세를 꺾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다. 유수는 AD256월에 황제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광무제(光武帝)였다. 광무제는 한나라의 국호를 연용(連用)하고 낙양으로 도읍을 정하니 역사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이를 동한(東漢) 또는 후한(後漢)이라 부른다.

 

일주서(逸周書)에 의하면 선조의 대업을 잇는 것을 광()이라 하고, 재앙과 환란을 평정하는 것을 무()라 한다고 되어 있다. 유수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를 계승하고 왕망이 어지럽힌 세태를 평정했다는 뜻으로 광무라고 했다. 18971012일 고종이 505년간 중국의 조공국이었던 것에서 벗어나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연호(年號)를 광무라고 했는데, 당시의 환란 속에서 한국인들이 독립과 평화를 얼마나 희구했는지 알 수 있다.

 

한 고조 유방은 저속하고 한 무제는 패기가 있었다면 지식인 출신이었던 광무제는 문화적 소양이 풍부했다. 그래서 유학자는 나라의 보배라는 이치를 잘 알고 있어 백성의 안정과 평화와 문화를 숭상하는 기조를 나라의 틀로 세웠다. 후한서순리열전(循吏列傳)에 따르면 광무제가 임연(任延, ?~AD67)에게 무위태수직을 내리면서 상관을 잘 모셔서 명예를 잃지 않도록 하라(善事上官 無失名譽)”고 이르자 임연은 신이 듣기로 충신은 사사로움을 도모하지 않고 사사로움을 도모하는 신하는 충성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바른 길만 밟고 공()을 받드는 것이 신하된 사람의 절도입니다. 만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뇌동하게 되면 폐하에게는 복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윗사람을 잘 모시라는 폐하의 조칙을 신은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광무제는 이 말을 듣고 감탄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상관에게는 죄를 짓더라도 백성에게는 죄를 짓지 말라고 했다. 다산(茶山)의 말을 가슴에 간직하고 임연처럼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이 전 대통령 박근혜 주위에 몇 사람만이라도 있었다면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또 동학(東學)의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사람마다 가슴속에 항상 한울님을 모셨기(侍天主) 때문에 누구나 존경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지식과 학문은 빛바랜 서재의 먼지 속에 묻히고 자신의 가치관은 권력과 돈에 눌려 주관이 흔들린다. 화려한 학벌과 경륜을 갖췄다 한들 그것이 인격으로 승화되지 못하는데 이 사회가 밝을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안타깝고 한탄스럽다.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던 시절에는 도덕, 윤리, 질서를 뒤로 제쳐두고 성장과 발전이라는 기능만을 앞세웠다. 그 결과는 우리 사회에 전례 없는 압축 성장을 가져다주어 경제로는 세계 10위권에서 맴돌게 되었다. 그러나 공동체 사회에서 필요한 신의와 성실을 잃었고, 빈부격차가 심해서 상대적 빈곤에 불만이 쌓여 상호불신이 만연하여 사회 기초가 흔들리고 기울기 시작했다. 갑질, 무시, 금수저, 은수저, 헬조선, 혐오가 밑으로부터 드러나고 산업화 시대의 가치관은 힘을 잃었다. 정보사회가 되어 우리는 검색만 하면 첨단 지식부터 오래된 고전의 교양까지 수시로 척척 검색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검색만 있을 뿐 사색이 없는 정보사회는 경박한 말놀음만 있을 뿐 실천이 없었다. 그 결과 이제 기존 체제, 기득권자들은 더 이상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정치적 역할을 다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일어난 촛불은 단순한 촛불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공동체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를 거쳐 새로운 윤리사회로 한발 더 나아갔다, 더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윤리사회는 책임이 의무이며 우선이라는 정신을 바탕으로 채워져야 한다. 책임 없는 지위, 책임 없는 정치, 책임 없는 권력, 책임 없는 교육 이제 모두 스스로 물러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촛불이 만드는 윤리사회의 정신, 이것이 새해 무술년에 한 소식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