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박제가(朴齊家)와 『북학의(北學議)』

  • 날짜
    2018-09-14 13: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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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개혁의지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내걸어 연구하고 업적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영조(英祖, 16941776) 후기부터 정조(正祖, 17521800)를 거쳐 19세기 전반기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실학이란 찬란하고 위대한 업적이었지만, 사실상 정조가 재위 24년만인 18006월에 붕어한 이후 50여 년간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의 강진 유배 20년과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제주 적소(謫所) 20년이란 오래고 지루한 귀양살이에서 얻은 고독한 학문의 결실인 동시에 현실에서 혹독하게 격리된 사상이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실학에서 이용후생이란 백성들이 모든 사물을 편하게 사용하여 발전시키면 서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풍족해진다는 내용인데, 바꿔 말하면 오늘날의 복지정책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높은 산봉우리 같은 학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와 그의 저서 북학의(北學議)가 돋보인다. 정조 대왕은 박제가를 송()나라 시대의 정치인이며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인 왕안석(王安石, 1021~1086)에 비유했다. 왕이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극진히 사랑했다는 의미이다.

 

박제가는 상소문인 응지진북학의소(應旨進北學議疏)에서 신이 엎드려 생각해보니 세상의 온갖 사물에는 정밀한 뜻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하늘이 아름다운 곡식을 내려주신 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우리 백성을 먹이는 그 일은 매우 중요하고 그 이치가 지극히 깊습니다. 어찌 남의 부림을 받는 종이나 어리석은 무리에게 맡기고 그 엉성하고 형편없는 보응을 앉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일에 맞는 사람을 기다린 후에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곡식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 기술이 없는 농민이나 종에게 맡길 일이 아니라 양반들과 함께 농사를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양반 상놈 가리지 말고 일을 해야 한다는 혁명적인 발상이다. 또한 그는 가난한 백성들은 부엌에 나무젓가락과 질항아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사는 까닭을 물으니 무쇠 솥과 놋수저는 수차례에 걸쳐 이정(里正)이 빼앗아가 이미 환적(還糴)으로 납부했다고 합니다.”라며 서민들의 뼈아픈 생활상을 임금에게 거침없이 직언했다. 이와 같은 박제가가 저술한 북학의의 내용은 무엇일까?

 

오랑캐라고 비하하고 상대하고 싶지 않은 청나라이지만, 선진화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내용인데, 관념적인 서설이 아니라 실질적인 분야에서 기계와 기술의 상세한 이치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똥거름을 황금인양 아낀다면서, 길을 넓혀 마차를 다니게 하고, 외국 배가 표류하여 고을에 정박하면 그 배를 면밀히 살펴보고 연구하여 좋은 점은 배워야 하고, 벽돌과 기와를 개량하는 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다. 청나라의 선진적인 여러 가지 문물을 면밀히 연구하여 조선에 맞도록 개량하여 도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 과거를 보기 위해 허송세월하는 선비가 넘쳐나니 그 수를 줄여야 한다. 이유는 크고 작은 과거 시험에 동원되는 인원이 10만 명이 넘고 그 가족과 형제들은 양반이라고 해서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다. 둘째 수레를 통행시켜 문물을 신속하게 유통교환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류를 유통시켜 산물이 썩거나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

 

당시 집권한 조선 사대부는 이미 멸망한 명()을 대중화(大中華)라 섬기고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챙기면서 긍지를 느끼는 종속적인 사고에 젖어 있었다. 사대(事大)가 지나쳐 명나라 사람보다 더 명나라 사람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청()의 선진화된 제도와 문물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라고, 귀를 막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술을 하거나 칭찬하는 사람조차 경멸했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그만큼 용기와 위험이 따르는 시대 상황 속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이런 풍토에 대해 만주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 개 짖는 소리와 같고, 먹는 음식은 냄새가 나서 가까이 하지 못한다. 심지어 뱀을 시루에 쪄서 씹어 먹고 황제의 누이가 역졸과 바람을 피워 가남풍(賈南風)이 했던 추잡한 소행이 곧잘 일어난다.”라고 이야기하면, 명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기뻐하며 내가 한 말을 여기저기 옮기기에 바쁘다면서 오늘날 조선 사람들은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속된 눈꺼풀을 달고 있어 아무리 애써도 떼어낼 도리가 없다. 학문에는 학문의 눈꺼풀이 문장에는 문장의 눈까풀이 단단하게 붙어 있다고 절규하고 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당시 상황이나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 어쩌면 그리도 닮았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제국(帝國)이 되고, 중국, 소련, 일본도 같은 길을 가고 있는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속된 눈꺼풀을 아교로 단단히 붙여놓고 있어서 국론은 분열되고 시민은 개인주의에 빠져 눈앞에 닥쳐오고 있는 미래도 보지 못하고 있다. 지난 6황해문화100호 심포지엄에는 중국과 미국, 호주, 일본, 대만의 석학들이 방문했다. 그 중에서 호주의 석학 개번 매코맥 호주 국립대 교수는 한국이 일본과 달리 미국의 종속국가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민주화운동 덕분이라고 말했다. 또한 중국의 석학 왕후이는 미국의 세계 패권을 당연한 것으로 믿고 이 질서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요동치고 변화하는 세계 질서의 전환기에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할 충고가 아닐 수 없다. <2018. 0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