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평등, 평화 그리고 조화

  • 날짜
    2019-06-05 14:51:53
  • 조회수
    768

<2019년 부처님 오신 날 말씀>

평등, 평화 그리고 조화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이렇게 좋은 날 인류의 스승이신 부처님을 뵈러오신 여러분 반갑고 고맙습니다. 이 전등사는 좋은 절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웅전을 비롯해서 기둥에 써있는 주련(柱聯)들은 글의 내용도 좋지만 우리나라의 당대 명필들의 글씨입니다. 19세기 후반에 태어나신 분들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고 또 숨겨둔 귀한 서첩에서나 볼 수 있는 글들입니다.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 선생,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의 글들입니다. 대웅전 주련에는 부처님 말씀을 번역해 놓았으니 법당에 들어가 인류의 스승을 뵙고 인사올리고 나와서는 기둥에 있는 글들을 감상하세요. 다른 종교를 가졌다 하더라도 글씨는 종교적 정신세계를 초월하는 예술이 아닙니까. 보고 또 보세요. 그 외에도 눈여겨볼 것이 아주 많은 사찰입니다.

 

요사이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고 말이 많습니다. 또 사회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분명한 것은 옛날에 비해서는 복지 문제가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지는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생활과 관계된 것이지 정신세계와 고요하고 차분한 정서 문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소의(所依) 경전인 금강경(金剛經)이라는 좋은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꼭 읽고 공부해야 하는 교과서 같은 경전입니다. 인도의 대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 1931~1990)’금강경을 번개처럼 번쩍 빛나면서 잘라내는 지혜(智慧)라고 말합니다.

 

먼저 이 앞에는 큰 스님, 정신과 학문이 높은 스님들이 많으신데 제가 건방지게 불경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금강경1. 일반적으로 일장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소명태자가 경을 나누면서 붙인 이름이니까요. 그런데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다로 시작하는 짧은 첫 장은 언제 읽어도 고요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감격스럽습니다.

 

어느 때엔가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부처님이 1250분의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마침 식사 때가 되어 제자들과 함께 성내(城內)로 탁발(托鉢)하러 줄지어 갑니다. 많은 제자들과 길을 걷는 모습은 아름답고 장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차제걸이(次第乞已)’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순서에 따라 탁발, 즉 구걸했다는 뜻입니다.

 

위대하고 존경하는 스님을 위해서 공양을 바칠 제자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당시 힌두사회에 뿌리 깊은 카스트(계급) 제도를 없애기 위해서 그리고 인류에게 조화로운 인간사회를 구현하고자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가 불교나라로 알려져 있는 버마, 일명 미얀마를 가보니 어린 스님들이 탁발하는 것이 보이는데 큰 스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기원정사로 돌아오셔서 식사하고 발을 닦고 부좌이좌(敷座而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스스로 자리를 펴고 앉아 명상에 들 준비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세존이 앉을자리가 없었겠습니까? 이것 또한 몸소 평등, 평화 그리고 조화를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그림 같은 장면이고 그 분의 사랑과 진실이 어우러져 참으로 장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왕 오셨으니 대웅적, 약사전, 어느 곳도 좋으니 안에 들어가셔서 서도 좋고, 앉아도 좋으니 두 손 합장하고 나를 낮춰 보세요. 그리고 마음을 부처님처럼 가져보세요. 이것이 불교에 입문하는 첫 걸음이고 행복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