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량치차오(梁啓超)의 조선망국론(朝鮮亡國論)

  • 날짜
    2019-06-05 14: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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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梁啓超)의 조선망국론(朝鮮亡國論)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전제왕정 봉건국가에서 직업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3천 년 전인 과거에도 []’이 나라나 개인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왔다. 역사서는 왕조의 흥망을 기술하고, 왕조의 인물들을 서술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화식열전(貨殖列傳)을 별도로 두어 이재(理財)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는 수많은 나라들이 치열한 쟁투를 치르며 무력에 의해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일이 다반사(茶飯事)이던 시대였다. 열국(列國)이 강국을 꿈꾸며 산업을 빠르게 발전시켰고, 부강해지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특히 기원전 4~5세기경 소를 농사에 이용하는 우경(牛耕) 기술이 도입되고, 철로 만든 농기구와 무기를 생산하게 되면서 인구가 급증하였고,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당시 지배층은 농민을 천하의 본(天下之大本)이라 하여 사() 다음으로 높이 취급했다. 그러나 이것을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면 사람(의 노동력)이 곧 경제이던 시대에 농토에 묶여 살아야 했기 때문에 심한 학정에도 불구하고 외국으로 도망칠 수 없는 농민은 국가의 황금처럼 경제의 기본이자, 때로는 병사나 노역으로 강제 동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강대국이란 얼마나 많은 농민을 보유하고 있는가가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었다. 그러나 공()과 상()은 농토에 묶여 있지 않기에 이해관계에 따라 외국으로 도피하거나 빠져나갈 수 있었다. 지배계급은 겉으로는 대접했지만 속으로는 항상 경계하고 신뢰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상업은 남을 속이는 것을 상례(常例)로 하고, ()은 농기구도 생산하지만, 살상을 기본으로 하는 무기를 양산한다는 명분으로 천시하는 사회적 풍조가 조성되었다. 겉으로는 인()과 덕()을 내세운 당시의 정치상황이 만들어낸 이중의 모순이었지만, 공상이 억압받은 까닭 중 하나는 상인 계층에 부()가 축적될 경우 지배계급을 위협하여 권력에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역사적인 예로 거상(巨商)이었던 여불위(呂不韋)가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子楚)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끝에, 마침내 그가 장양왕(莊襄王, B.C.249~247 재위)에 즉위하자, 자신은 승상(丞相)이 되고 문신후(文信侯)로 봉()해져 낙양(洛陽) 부근의 식읍(食邑) 10만 호를 받아 진()나라는 물론 천하제일의 부귀와 권세를 누리게 되는 일도 있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역사적 전통이 있기에 문화혁명과 대약진운동의 혼란이 끝나고 집권한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정책을 주장하며 선부론(先富論)을 기치로 내건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토양이 만든 기본 철학이며 습관이란 생각이 든다.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부의 위력과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과 윤리 그리고 질서를 귀하게 여기고 지키려고 노력한다. 여기에 법으로 정한 국민의 의무나 질서는 국가와 타인을 위해서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적으로 우리들 스스로를 위해서, 또 우리 자손의 미래를 위해서 지켜져야 한다. 이 근래 현찰과 금괴를 집에 숨겨두고, 고급 외제승용차를 굴리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으려다가 국세청에 발각되는 망측한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이외에도 세금과 벌금을 회피하기 위해 위장 이혼하는 사례들도 종종 듣게 된다. 한국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대기업 제약회사가 연구결과를 허위로 만들어 위험한 약을 제조하여 시판하는 생명 경시의 천박한 짓을 하다가 면허를 취소당하는 사건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식의 심층부가 어디까지 타락한 것인지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왕조 후기 우리나라의 언론, 학자, 젊은이들, 특히 당시 역사의식을 가지고 정론을 펼치던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장지연(張志淵, 1864~1921) 등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였다. 해방 이후까지도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량치차오는 누구나 인정하는 유신주의자, 계몽주의자 그리고 문사철(文史哲)에 깊은 조예가 있는 행동하는 언론인이자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당대 중국의 학계, 정치계, 교육계 등 다방면에서 큰 정신적 울림을 준 사상가였다. 량치차오는 망해가는 조선왕조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그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때로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오랜 세월 중화의 종속국가로 있던 조선을 일본이 점령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함께 중국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결심한 것으로 인다. 그래서 구한말 조선의 정황을 가혹하게 비판하면서도 항시 우리 중국은! 우리 중국은!”이라고 되새기면서 글을 쓰고 있다. 그의 비판이 지나친 점은 있지만, 우리들 역시 냉철한 지성과 가슴으로 새겨들어야 할 내용도 있다.

 

무릇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한 연후에 남이 정벌한다. 조선이 만약 스스로 망하지 않는다면 망하게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일본병탄조선기중에서>

 

벼슬하는 자들도 오늘 권세가 있으면 내일 나라가 망해도 아무 대책 없이 국가의 운명을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멸망의 원인중에서>

 

이외에도 우리가 가슴깊이 새겨야 할 내용이 많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인은 자립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천성을 지녔다. 이렇게 자주의식이 박약한 것은 결국 개인주의 성향의 국민성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세계에서 개인주의가 가장 심한 나라 중에서도 조선이 첫째라고 편파적인 평가로 비약하기까지 한다. 조선의 미래를 제시하는 지도자가 없다는 내용도 있다. 나는 량치차오의 그릇된 평가에 분노하기 전에 우리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이 그의 글들을 탐독하고(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글항아리, 2014),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시민 앞에 내놓을 수 있는 논리와 용기와 저력을 보고 싶다.

 

지금 우리는, 아니 세계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미·중 경제 전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지도자들은 미래를 대비하는 정책의 빈곤 이전에 이에 대한 염려와 생각조차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살펴보면 막말과 저주로 끝을 보려는 전투장을 방불케 한다. 지도자들이 국민을 위로하고, 시민에게 꿈과 희망, 보다 나은 미래를 제시하기 위한 정책 개발과 고민으로 국회 창문이 밤새 밝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조 때 호조판서 이태좌(李台佐, 1660~1739)말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따지고 몸으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따른다는 말을 임금에게 직언(승정원일기, 영조 3103)한 바 있다. 또한 조야의 존경을 두루 받았던 유학자 송병선(宋秉璿, 1836~1905)도 고종에게 같은 내용을 상소하는 것이 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