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민족의 혼과 얼이 서린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 날짜
    2020-03-16 10: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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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혼과 얼이 서린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새얼문화재단이 매년 치르는 역사기행이 어느덧 34회를 맞이하여 올해는 신안(新安), 진도(珍島), 목포(木浦)23일간 다녀왔다. 196911일부터 무안군의 도서지역만을 따로 떼어내 신안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신안군의 1004개 도서 중에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인도가 72, 무인도가 932개 섬으로 인구는 44천여 명에 이른다. 바다와 어우러진 섬들은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서민 스스로 만들어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정약용 형제가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로 인해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전남 강진으로, 둘째 형 손암 정약전(巽庵 丁若銓, 1758~1816)은 흑산도로 유배된다. 정약용은 다산초당(茶山草堂) 언덕에 올라 흑산도를 바라보며 눈물과 한숨으로 형을 그리워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6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한국 최초의 어류 도감이라 할 수 있는 자산어보(玆山魚譜)3권을 집필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 지역에 두문사객(杜門謝客, 문을 닫고 손님도 받지 않으며 공부만 하는) 선비 장덕순(張德順)의 도움과 협력 그리고 현지 어부들의 경험에서 얻어낸 지식이 손암에 의해서 정리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순박한 어부들의 땀으로 뭉친 경험에서 묻어난 지혜가 아니었다면 자산어보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저자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서신에 흑산도라고 하면 얼마나 험하길래 흑산이냐고 걱정하실까봐 자의 뜻이 담긴 자()를 사용하여 자산도라고 했기 때문에 흑산어보가 아닌 자산어보가 된 것이다.

 

천사대교와 인천대교의 주경 간 폭


나는 지금 압해도(押海島)와 암태도(巖泰島) 사이를 연결하는 천사대교(千四大橋)를 버스로 지나고 있다. 15년 전이었던 20056월 인천대교(200910월 완공)의 주경 간 폭을 넓히기 위해 인천시민들이 뜻을 모으고, 한편으로 항만업계 종사자, 사용자, 노동자, 순수한 시민들이 단결하여 우리의 의지를 정부에 강력하게 전달했다. 비록 공사가 6개월 이상 지연되긴 했지만, 결국 주경 간 폭을 확장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천사대교를 건너면서 당시 생각이 들어 감개가 무량했다.

 

인천대교의 주탑 높이는 230.5미터(63빌딩 높이, 세계 5), 천사대교는 125미터, 인천대교의 주경간은 800미터, 천사대교는 신안군 소재 1,004개 섬을 상징하는 1,004미터이다. 인천대교의 교량 길이는 18.38킬로미터(국내 최장 길이)이고, 천사대교는 7.22킬로미터에 이른다. 인천대교는 6차선, 천사대교는 2차선(일부구간 3차선), 예산은 인천대교가 24,234억 원이었고, 천사대교는 5,814억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천사대교의 주경 간 역시 처음 설계 당시에는 3천 톤급 정도의 배가 통과할 수 있는 규모였다가 목포해양대학 연구소에서 앞으로 중국과의 교역을 생각하고, 선박의 대형화가 세계적 추세인 만큼 5만 톤급 선박이 다닐 수 있는 규모로 설계를 변경하여 예산도 따라서 대폭 증액되었다. 다리의 기능은 주경 간 폭이 얼마나 넓고 주탑의 높이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그 가치와 용도가 결정된다. 인천대교는 주탑이 높기에 인천항에 대형 크루즈 선박이 들어올 수 있지만, 부산항은 규모가 크더라도 입항하지 못한다. 인천시민의 선견지명과 그 뜻을 받아준 정부의 정책 변경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대교의 주경간 폭은 천사대교보다 204미터가 적다.

 

일제에 빌붙은 지주들과 암태도 소작쟁의


, 암태도! 191931운동 이후 일본은 겉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했지만 침탈의 내용은 더욱 조직적으로 변모했고, 심해졌다. 암태도 소작쟁의(1923~1924)는 민족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낡은 제도와 외세에 대한 저항의 불길이 항쟁으로 거듭난 사건이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비호를 받아온 악덕 지주들은 보통 그해 수확량 중 50%정도를 소작료로 받던 관례를 깨고, 60~80%로 인상하였다. 암태도 농민들은 분연히 일어나 이들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편파적으로 소작인들을 구속하였고, 아사투쟁(餓死鬪爭)에 나서기로 결의한 암태도 주민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13명 중 5명이 실형에 처해졌다. 근 일 년여 동안 목포 검찰청과 법원을 드나들면서 이들이 당한 고생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1920년대의 암태도 소작쟁의는 서해안의 여러 섬인 자은도, 비금도, 도초도, 하의도 등에서 소작쟁의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암태도 도민들의 치열한 항거 덕분에 소작료를 논 40%, 50%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에 대해서는 송기숙 선생의 소설 암태도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당시 7할이 넘는 소작료를 4할로 내리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일반적이었던 5할의 세율보다 낮춘 것이다. 이것은 암태도 농민만의 승리가 아니라 전국 농민의 승리이며 그 뜻은 민족의 저항정신으로 승화되었다. ‘암태도 농민 항쟁 사적비가 선착장 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데, 이 암태도 농민항쟁에 대한 설명은 하늘고등학교 교감 이영종(역사 전공) 선생의 설명으로 더욱 빛났다. 비석에는 쟁의에 앞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