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거동궤 서동문(車同軌 書同文) - 2

  • 날짜
    2020-03-16 1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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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동궤 서동문(車同軌 書同文) - 2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맏형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14년이나 세자로 재임하다가 1418년 폐위되어 물러난 지 두 달 만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곧이어 아버지 태종은 주상이 아직 장년이 되기 전이므로 군사(軍事)는 내가 직접 처리한다.”는 조건을 달아 셋째 아들 도()에게 왕위를 선양하니 그가 곧 세종이었다. 그러나 임금이 되던 1418년 이후 세종은 개인적으로 불행하고 어려운 시절을 거친다.

 

당시 안남(安南, 오늘날의 베트남)은 진조(陳朝·1225~1400)가 무너지고 1400년에 호뀌리(Ho QuyLi, 1360~1424)가 정변을 일으켜 새롭게 호조(胡朝)를 세워 왕위에 올랐다. ()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1360~1424)1406년 정이장군(征夷將軍) 주능(朱能)에게 80만 대군을 동원해 호뀌리 부자를 납치했다. 처음엔 진 왕조의 자손 중에서 현자를 세우겠다.”고 했으나 막상 승리하고 나서는 안남을 직할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은 신생 조선에게는 공포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국제정세를 관망하면서 태종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 1375~1419)을 영의정으로 영전시켜 사은사(謝恩使)로 명에 보냈다. 그러나 심온은 명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었다. 죄명은 강상인(姜尙仁, ?~1418)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병조참판 강상인은 본래 태종 이방원의 가신이었는데, 군사문제를 세종에게만 보고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태종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세종에게 선양할 때부터 군사문제는 직접 처리하겠다.”고 공언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대단히 분노했다.

 

임금의 경호부대를 관할하는 동지총제(同知摠制) 심정(沈泟)이 심온의 동생이었기에 의혹은 역모로 번져갔다. 죽으러 가는 강상인이 매를 못 이겨 거짓 진술했다는 것을 토로했으나 사건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심온심정 형제가 처형당하고 심온의 부인 순흥 안씨는 노비가 되었다.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집안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실록에는 심온이 임금의 장인으로 순서를 뛰어넘어 수상에 오르니 세도와 영광이 혁혁하여 이날(사은사로 가는 심온을)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때 심온의 나이 마흔네 살이었는데, 연려실기술은 상왕(태종)이 소문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권력과 영광은 오로지 왕만이 독점해야 한다는 신념의 태종이 가만히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따라서 강상인 옥사의 진실은 왕실의 외척을 근본적으로 배제한다는 정략의 일환이었다. 태종 자신도 왕으로 등극하는데 절대적인 공로가 있었던 친구이며, 부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친정 오라비 민무질, 민무구, 민무휼, 민무회 사형제를 모두 처단하지 않았던가!

 

심씨 일문의 멸문지화는 태종이 세종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작한 첫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종은 임금이지만 권력도, 세력도 없었다. 경회루에서 세종이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리는데 상왕인 태종은 앉은 채 받았다. 훗날 세종은 자신의 초기 4년은 모두 태종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으니 4년간의 사초(史草)는 모두 태종실록에 기재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세종은 이 외롭고 어두운 시간을 인내하면서 자기 자리를 하나씩 찾아간 사람이었다. 역성혁명에 의해 왕씨(王氏)가 이씨(李氏)로 바뀌기는 했으나 고려의 명문대가와 사대부 세력은 조선에서도 그 세력을 유지했다. 존경의 대상인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선죽교에서 타살당하고 3개월 후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 되었으나 12차 왕자의 난이라는 집안 권력 다툼, 고려 때부터 명문거족으로 자리 잡은 민씨 형제, 또 심씨 집안에 사약을 내리는 잔인함, 백성들은 조정에 고개를 숙이고 따라는 가지만 집안에서는 무인 이성계의 후손이 그러면 그렇지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을 것이다. 이방원이 과거 급제하자 이성계가 사당에 나가 큰절하고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칼과 힘이 있어 무릎은 꿇지만 그래도 너희들은 서북 변방 출신 칼잡이에 불과하다는 트라우마가 세종을 정신적으로 괴롭혔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보면 세종이 산을 옮긴 우공(愚公)처럼 고독하게 참고 기다리며 적절한 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백성이 상관이나 수령, 관찰사의 잘못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을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라고 하는데, 예조판서 허조(許稠, 1369~1439, 후에 영의정이 됨)가 세종 2, 상왕(태종)에게 눈물로 애원하여 제정한 법이었다. “부민과 수령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 신하와 임금의 관계와 같아서 절대로 범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 허물과 악함을 고소하면 신하와 아들이 아비와 임금의 허물을 들추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허조의 입법 취지는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아랫것들은 상전에게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제도 하에서는 힘없는 백성, 노비들의 원억(冤抑)을 풀길이 없다는 것을 세종은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법을 폐지하는데 11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세종은 태종이 서거하고 나서 조정의 신료와 집현전 학자들에게 이 법을 시정할 수 있는 근거를 널리 구하도록 요구한다. ()나라의 법전인 지정조격(至正條格)까지 찾아 허조의 논리를 하나하나 논파해 나갔다. 노비나 백성이 고소할 수 없었던 것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고발할 수 있게 만들고, 여종도 신문고(申聞鼓)를 칠 수 있도록 사헌부에 명을 내리고 종의 재산도 보호하도록 했다.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이 법을 세운 본뜻은 양민이 날로 증가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권근(權近, 1352~1409)의 조카이자 집현전 학사 권채(權採, 1399~1438)가 첩인 여종을 죽게 했다는 죄상이 드러나자 그를 파면했다. 이때에도 허조는 양반이 종에게 한 행위로 외방으로 보내는 것은 강상(綱常)에 어긋난다고 반대했으나 세종은 여종이었어도 첩으로 삼았으면 그 예로 대접해야 한다면서 크게 진노했다. 이색(李穡, 1328~1396)의 손자이며 조정에서 벼슬한 이종덕(李鍾德)의 아들인 좌찬성(1) 이맹균(李孟畇, 1371~1440)의 부인이 종을 살해한 죄로 벼슬을 파면하고 유배를 보냈는데 그때 나이가 일흔 살이었다. 위의 예를 든 것은 비교적 권력과 벼슬이 높은 경우이고 그 이외에도 노비나 종에 대해 못된 짓을 한 경우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히 다스렸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세종은 임금으로 막강한 힘이 있었음에도 허조에 대해 시간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설득하고 시행해 나가는 모습이다. 한 번 잘못 정해진 법률을 고치기까지 견디기 힘든 긴 시간을 보냈다. 훗날 세종이 허조에 대해 이르길 고루한 유생이라고 평하면서도 그가 청백리였다는 것은 인정해주었다. 노비는 장획(臧獲)이라고 해서 집안의 재산이나 물건으로 취급하던 시대에 백성을 굶어죽게 한 수령은 곤장 100대를 때리라고 명하고 이렇게 처벌받은 수령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백성은 하늘이 내린 사람[天民]이라고 생각한 세종의 생각은 바로 이런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