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

  • 날짜
    2021-06-30 15: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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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잘 아는 <장자(莊子)> 제20편 '산목(山木)' 끝자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보인다. 양자(陽子)가 송(宋)나라에 가서 여관에서 하루를 보내는데, 그 여관 주인은 아름다운 여인과 못난 여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여인은 천대를 받고 못난 여인은 귀염을 받았다. 양자가 그 까닭을 주인에게 물었더니 주인이 답하길 “저 미인은 저 스스로 미인이라고 자랑하고 자만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고, 저 못난이는 스스로 못난 줄을 알고 모든 일에 겸손하게 처신하기 때문에 나는 못난이에게서 부족한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양자는 주위의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잘 기억해두어라. 그 행실이 어질고도 스스로 어질다는 생각을 버리면 어디에 가든 사랑받지 않을 것인가!”

이 이야기는 겸손이 무엇인지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지난 4월7일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치러진 보궐선거는 여야가 서로 치고 받는 비난만 있었지, 시민을 위한 미래지향과 꿈이 담긴 희망의 설계가 없었다. 한마디로 어린 사람들이 볼까 두려운 이전투구(泥田鬪狗)였다. 양자는 제자들에게 두 부인 이야기를 꼭 기억하라고 당부했지만, 아마도 이번 선거는 시민의 가슴 속에 깊이 간직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이 시민 앞에서 겸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항시 자기편이라고 제멋대로 단정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항시 정치인편이 아니라 시민 자신들의 편이라는 사실을 여야 지도자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은 위대한 사상가이며 불후의 명작이자 방대한 기전체 사서인 <사기(史記)>를 저술한 역사가였다. 인간적으로는 친구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한무제(漢武帝)에게 궁형(宮刑)을 받아 남자로서는 치욕적인 삶을 살면서도 역사의 토대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다. 특히, 나는 사마천이 공자(孔子)와 진승(陳勝)을 제후 열전이 아닌 '세가(世家)'에 기록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한다. 지금은 만세의 사표로 추앙받는 공자이지만, 그의 집안은 내세울 것 없는 한미한 서민 출신이었고, 봉건제 계급사회에서는 그런 출신의 한계가 더더욱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진승은 머슴 출신으로 진시황 사후 그 무섭고 엄격한 법률이 시행되는 힘 있는 제국 치하에서 최초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사마천은 그 뜻을 높이 평가해 '열전(列傳)'이 아닌 '세가'에 기록해 그 의미를 크게 부각시켰다. 초기에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조차도 진승 휘하에 있었다.

그런 <사기열전(史記列傳)> 권81에는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 이야기가 있다. 차지하는 사람이 장차 천하를 통일한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화씨의 벽(和氏之壁)'을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이 가지고 있었다.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 진시황의 증조부)이 진나라의 15개 성읍(城邑)과 화씨벽을 바꾸자는 서신을 보낸다. 소양왕은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하나로 장차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강력한 군주였다. 조나라 혜문왕은 염파 장군을 비롯해 여러 대신과 상의했다. 화씨의 벽을 진나라에 주자니 진나라가 성읍을 내주지 않을까 우려되고, 주지 않고 버티자니 진나라 군대의 침공이 걱정되어 좀처럼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진의 소양왕에게 가고자 하는 사람조차 구하기 어려워 결국 인상여가 가게 되었다. 인상여는 환관의 우두머리인 무현(繆賢)의 식객(食客)에 불과했다.

인상여는 호랑이굴 같은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기지와 용기를 발휘해 화씨의 벽을 무사히 가지고 돌아왔다. 이 일화를 가리켜 완벽귀조(完璧歸趙)라 하였고, 이 말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완벽'이란 말이 유래되었다. 인상여가 진나라에 들어가 외롭게 생명을 걸고 활약한 짜릿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사기열전> '인상여'편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인상여는 이외에도 조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어려운 고비를 사력을 다해 넘기곤 했다. 혜문왕은 그 공을 높이 치하하고,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상경에 임명하니 염파 장군보다 윗자리였다. 염파는 전쟁에 나가 여러 차례에 걸쳐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집안 내력으로 보나 연배로 보나 인상여보다 지체가 높았다.

염파는 인상여를 벼락출세한 인물로 여겨 만나기만 하면 모욕을 주고자 별렀다. 이 소식을 들은 인상여는 조정에서는 병을 핑계로, 길에서 혹시라도 염파가 저 멀리서 나타나기만 해도 피했다. 이 소문이 조나라 수도인 한단(邯鄲) 전역에 널리 퍼지니 인상여의 사인(舍人)들이 “우리가 집을 떠나 당신을 모시는 것은 당신의 높은 뜻을 사모하기 때문인데, 염파에 비해 서열이 높으면서도 그를 두려워 피하고 무서워한다는 것은 보통사람도 부끄러워 할 일이니 우리는 이만 당신 곁을 떠나겠습니다”라고 했다. 인상여가 만류하면서 “그대들은 염파 장군과 진나라 왕 가운데 누가 더 무섭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염파 장군은 진나라 왕에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진나라 왕의 위세에도 그 나라 조정에서 그를 질타하고 그 신하를 모욕했소. 내가 아무리 어리석어도 염파 장군을 두려워할 리가 있소. 다만 강한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상여와 염파가 있기 때문인데, 이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싸우면 필히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내가 염파 장군을 피하는 것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적인 원한을 뒤로 돌렸기 때문이오.” 그러자 인상여의 가인들은 모두 감격해 눈물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염파 장군은 어깨를 드러내고 가시나무 채찍을 등에 진(육단부형, 肉袒負荊) 채 인상여의 집에 찾아가 스스로 죄를 청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생사를 함께 한다는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어 이 두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감히 누구도 조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지금의 국제정세를 살펴보건대 춘추전국시대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힘과 자본이 전횡적으로 작동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하고 찾아보아도 자기나라의 이해관계 없이 우리나라를 돕고자 하는 나라는 세상에 없다. 나라가 있고서야 여당도 야당도 있는 법이고, 국가흥망의 위기 앞에서 각자 입장과 역할이 어찌 따로 있다고 하겠는가. 무릇 정치인은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자동차라 할지라도 고객이 거부하면 고물이 되고 만다. 국민의 의지는 천명(天命)이기 때문이다. 가르치려고 하면 할수록 국민은 멀어진다.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문화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상대를 인정하고 여유와 대화를 통해 조화를 이루어 갈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절실하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