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국난극복(國難克服)의 힘을 상기하며

  • 날짜
    2021-10-14 10: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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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긴 시간이었습니다. 온 지구가 뜻하지 않은 역병(疫病)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모두 많은 어려움을 마다치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한 번도 끊기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36년(412회)을 진행해온 아침대화마저 건너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근래 진행되는 우리나라 코로나 방역상황과 백신접종 현황을 보면서 앞으로는 쉬지 않고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중 관계가 점차 불편한 갈등으로 심화하면서 세계정세가 신냉전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을 보면 중국과 접해있으면서도 미국의 협력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더욱 정치·경제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깨어있는 자세로 역사를 고민하고, 이를 통해 오늘의 상황에 대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56개 민족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다민족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오면서 크건 적건 하나의 국가였습니다. 역사가 깊은 대단한 중국문명과 문화는 중국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서구와 아프리카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금도 중국·한국·일본·대만·싱가포르 사람의 이름은 대부분 한문(漢文)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중국은 아시아 문명의 중심으로 주변 여러 국가와 민족들과 사대관계를 맺었지만 한국과 베트남만은 중국에 복속되지 않고 독립국으로 살아남아 오늘날 세계 각국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베트남이 세계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독립을 유지해온 과정은 필설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 침략자들이 물러났으나 프랑스는 이전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즉시 통치력을 회복할 정도로 확고한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북부에서는 호찌민(胡志明, 1890~1969)이 이끄는 정당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회)을 선포하고 식민통치를 위해 돌아온 프랑스와 1946년부터 전쟁에 돌입합니다.

1954년 3월13일, 베트남 서북부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를 공격한 베트민은 같은 해 5월7일, 마침내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합니다. 8년여에 걸친 격렬한 전투였습니다.

남쪽에서는 1949년 바오다이(保大, 1913~1997) 황제를 수반으로 하는 남베트남 정부가 수립됩니다. 프랑스도 미국도 이 정부를 승인하고 지원했지만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한 후 떠나고, 미국은 1964년 8월7일 통킹만 사건으로 베트남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1975년 4월30일, 장장 11년에 걸친 전쟁에서 패하고 남베트남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미군 전사자가 5만8315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로도 베트남은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베트남의 국토면적은 33만2000㎢로 한반도 면적 22만㎢(한국 10만㎢)와 비교하면 조금 더 큰 나라입니다. 현재(2020년) 베트남 인구는 9000만 명으로 한국과 북한 합산인구와 비슷합니다. 식민통치를 하던 프랑스에 승리하고, 이어서 미국과 중국에도 이긴 나라가 베트남입니다. 참으로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러면 한국은?

최부(崔溥, 1454~1504)는 조선 성종과 연산군 시대의 문신으로 그가 남긴 〈표해록(漂海錄)〉은 43명의 일행이 표류하여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6개월 동안 중국을 견문한 기록입니다. 꼼꼼한 기록과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많은 '표해록' 중에서도 단연 백미(白眉)로 손꼽힙니다.

이 책의 내용은 성종시대 관리였던 최부가 제주도로 출장간 사이 부친상을 당해 급히 고향 나주로 돌아가던 중 흑산도 인근에서 태풍을 만나 사경을 헤매다 중국 절강성으로 표류하게 됩니다. 처음엔 왜구(倭寇)로 오인 받아 옥중에 갇히게 되지만, 그의 인격과 중국고전에 통달한 사실을 필담(筆談)으로 알게 된 중국 관리들이 태도를 달리하게 됩니다.

중국 관리의 안내를 받으며 북경으로 가던 중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에 잠시 머물게 되는데, 이 지역의 수장쯤 되는 사람이 그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너희와 같이 작은 나라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어찌 수당(隋唐)같이 큰 나라를 이길 수 있었느냐?”고 묻는 대목이 있습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당시 세계에 존재하던 어떤 나라와도 비교될 수 없는 강력한 문명과 문화를 갖춘 나라였습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의 인구가 백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유럽의 런던이나 파리의 인구가 채 10만 명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통설입니다.

수와 당은 오늘날에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조선 성종 때의 문답이니 시기적으로 거의 천 년이 흘렀지만, 중국은 자신들이 당한 뼈아픈 패배의 역사를 명나라 지식인들이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명심하고 긍지를 가질 만한 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고전극의 대표인 경극(京劇)에서 을지문덕 장군이니 연개소문 장군이 악역으로 분장되는 예가 종종 있는데, 이는 자신들의 뼈아픈 패배를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도, 성공도 거듭하고 있습니다. “삶을 이어가면서 실패가 없었다는 것이 결코 자랑이며 영광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나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참으로 승리”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존경하는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뚫고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몸속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국난극복의 힘이 체질화된 강인한 정신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말이 있고 우리의 글이 있으며, 우리 국토가 있고, 드높은 문화의 힘이 있으며 무엇보다 사람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