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자국우선주의 시대에 우리의 진로는?

  • 날짜
    2022-12-15 10: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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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1941년 4월13일 모스크바에서 조인한 '소련-일본중립비밀조약'이라는 것이 있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었지만, 소련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중립을 지켰다. 만약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일본이 협공했다면, 소련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이 있다.

일본은 어째서 소련과의 약속을 지켰을까? 소련이 내몽골과 만주국을 포함하는 중국 북부의 3성에서 일본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석유와 고무가 풍부하게 생산되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가 일본의 세력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으로의 진출을 지지하고 동의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과 일본이 이렇게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약속이 지켜진 이유는 정치·경제·군사적 측면에서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미국과 치열한 격전을 치루는 동안에도 소련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과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1945년 2월 당시 소련의 크림반도에 위치한 얄타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 등 세 지도자가 회담을 가졌다. 소련은 유럽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패전이 짙어지자 동맹국들에게 극동 지역에서의 영토를 요구하면서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면 2~3개월 내에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약속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반도의 38선 분할은 사실 이때에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독일이 1945년 5월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자 소련은 일본을 공격할 여유가 생겼다. 동시에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전쟁 중이며 특히 이오지마 및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항전으로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거듭해서 소련이 대일참전을 요구했다. 미국이 일본 본토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자신의 몸값을 불리기 위해 참전을 미루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하자 일본의 패망이 앞당겨진다고 판단한 소련은 이틀 뒤인 8월 8일 재빠르게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에 합류했다. 소련은 만주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웅기, 나진, 청진 그리고 평양까지 점령했으며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8월말까지 침공을 계속했다. 이러한 소련의 전략에 일본인들의 절망은 하늘을 찌르고 배신감은 바다를 덮었으리라. 그러나 이런 절박한 패전을 앞두고 일본의 총리를 세 차례나 역임한 고노에 후지마로(近衛文 ,1891~1945)는 “소련 참전은 신이 일본에 준 선물로 이제 전쟁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와 같이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택한 것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일본의 히로시마 핵폭탄 투하 때문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소련이 파죽지세로 만주를 점령하고 일본 본토까지 침공하게 되면 일본은 사회주의가 되고 천황제가 폐지될지도 모른다는 위협 때문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류설과 다른 연구와 주장도 계속되고 있다. 그 내용은 일본의 패전 후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항복을 일부러 늦췄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소련의 참전을 유도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소련 대립구도를 만들어 일본이 패전 후에도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치와 역할이 필요하다는 '세력균형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일본이 소련의 참전 이전에 항복했다면, 과거 일본이 점령했던 중국 본토 및 만주 그리고 한반도 전역이 미국의 세력권으로 확대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미국은 아무런 견제 없이 일본에 대해 가혹한 전후처리를 강요하고 전후 일본의 역할과 지위 역시 처참할 것이라고 계산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아시아 전문 연구자인 고시로 유키코(小代有希子)가 2004년 미국 <미국 역사 학보>에 발표한 논문 <유라시아의 쇠퇴 :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전략(Eurasian Eclipse : Japan's End Game in World War Ⅱ)>에 따르면 위와 같은 분석을 하고 있다. 유키코 교수는 일본이 1944년 10월 필리핀 근해에서 벌어진 레이테만 해전에서 크게 패한 뒤 더 이상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을 유도해 세력 균형의 기회를 얻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종전 전략을 수립하고 연구한 다카기 소키치(高木憁吉) 해군 소장은 1945년 3월의 보고서에서 “미국은 소련을 단독으로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만 일본의 역할을 인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합동본부(대본영)에서 대소련 종전 공작을 담당한 다네무라 사코(種村佐孝) 대령도 일본은 미군의 본토 공격과 상관없이 소련이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한 뒤에 항복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러한 분석의 배경에는 만주에 있던 전투력이 강한 관동군 백만이 소련에 대항하지 않고 후퇴만하다가 항복한 이유도 상기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일본군이 '1억 총옥쇄(一億總玉碎)'를 부르짖는 전쟁광으로서 일본 민간인의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이지만 그 와중에도 망해가는 전세 앞에서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고 연구하는 열정과 탁견은 존경할 만하다. 이러한 상황과 현실에서 고노에 후지마로의 견해가 나온 것이다.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연설이 발표되고 반 년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합의하에 남침이 시작됐고 중공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의 북진이 38선 이남에서 머문다면 중공은 참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1880~1964)는 북한을 넘어 만주까지 진격하겠다는 강경론을 주장하고 트루먼 대통령과 대립하여 사임했다는 것이 대체로 우리가 아는 상식이다. 이와 다른 견해를 발표한 학자도 있다. 중국하동사범대학교 션즈화(沈志華) 교수는 <극동에서 소련의 전략적 이익 보장 : 한국전쟁의 기원과 스탈린의 정책 결정 동기>라는 논문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1950년 1월26일 중국은 '창춘철도와 뤼순과 다롄항에 대한 협정'을 소련 측에 전달하고 2년 내에 동북 지역의 모든 주권을 회수하겠다는 뜻과 함께 약속을 지키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대해 소련은 중국측 요구를 수용했다. 곧이어 1월30일 스탈린은 북한 주재 스티코프 대사에게 전보를 보내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의하고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 이전부터 김일성은 여러 차례 남침 승인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유보적이었다. 스탈린이 돌연 입장을 바꾼 것은 뤼순 및 다롄항을 상실하고 아시아·태평양 거점 부동항을 한반도에서 찾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당시 중공은 국공내전으로 국력이 소진되어 전쟁할 여력이 없었고, 전후 막강한 힘을 가진 측이 소련이었던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션즈화 교수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이처럼 큰 나라들의 패권 경쟁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진실이 차차 밝혀지게 된다. 그것도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계속 연구하면서 깨어있는 의식이 살아 움직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근래 한국의 대기업들은 계속해서 생산 거점을 미국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하고 있다. 생산 거점의 이동은 수많은 협력 업체의 이동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에 따라 우수한 인재의 유출도 가속화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장기화된다면 국내 제조업의 공동(空洞)화 현상이 벌어지고 중소기업은 더욱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물류 역시 줄어들어 일자리가 줄어들고 제살 깎아먹는 금융 쪽으로 빠지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큰 나라들의 자국 우선주의를 정의로 내세우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앞으로 우리 앞에 닥칠 파고는 더욱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한 촌로(村老)의 우견(愚見)에 그치길 바랄 뿐이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출처 : 인천일보(http://www.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