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제(齊)나라의 어떤 사람

  • 날짜
    2023-03-22 16:4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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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맹자(孟子)>는 유교의 기본 경서인 '사서(四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중 하나로 전국시대 사상가인 '맹가(孟軻)'의 말씀, 제자와 나눈 치열한 논쟁, 제후와 대화에서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위민사상(爲民思想)을 설파한 내용이다. <맹자>는 유교 경서이지만 특이할 만큼 격정적이다. 임금의 위치보다 백성(民)을 우위로 보고, 임금도 덕을 잃으면 용상(龍床)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맹자가 제도적으로 공자 사당에 배향하게 된 것은 그가 탄생하고도 천여 년이 지나 북송의 개혁가 왕안석(王安石, 1021~1086)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졌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인 한유(韓愈, 768~824)를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훌륭한 학자들이 맹자의 사상을 높이 평가했지만, 백성을 천하의 근본으로 무겁게 보고 임금이 잘못하면 바꿀 수도 있다는 사상을 좋아할 왕조가 많을 리 없었다. 과거시험에 <맹자>를 제외한 왕조가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 있다. 우리나라에 맹자가 들어온 것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이며 맹자사상을 실천에 옮긴이는 조선 왕조의 기초를 설계한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이라 할 수 있다.

<맹자>에는 놀랍게도 '맹자 왈 공자 왈'의 고담준론(高談峻論)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민사회에 떠도는 이야기 같이 재미있는 내용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단순히 웃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저리다.

 

백성의 삶에서 길어 올린 촌철살인

맹자가 말씀하기를, 제나라 사람 중에 아내와 첩을 거느리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 남편(良人)이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배부르게 마시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아내가 남편에게 “누구와 함께 마시고 먹었느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부귀한 사람들이었다. 현명한 아내가 첩에게 일러 말하기를 “남편이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실컷 마시고 먹은 후에 집에 돌아오는데 '누구와 더불어 마시고 먹었느냐?' 물으면 모두가 부자이고 귀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일찍이 한 번도 현달(顯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한 인물이 찾아오는 이가 없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남편이 가는 곳을 엿보고 오겠다”하고는 아침 일찍 남편이 가는 곳을 가로질러 따라가 보니 온 도성 안을 두루 다녀도 남편과 마주 서서 말하는 이가 없었다.

드디어 동쪽 성 밖의 공동묘지에서 제사음식 남은 것을 빌어먹고, 부족하면 또 다른 곳을 돌아보면서 구걸해 먹으니 이것이 그가 술과 고기를 실컷 마시고 먹는 방법이었다. 그의 아내가 집에 돌아와 첩에게 일러 말하기를 “남편이란 존재는 우리가 우러러 섬기며 한평생을 같이 마치는 신분인데 이제 이런 꼴이 되었다”며 남편을 원망해 서로 울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이란 사람은 그런 내용을 알지 못한 채 밖에서 돌아와 아내와 첩에게 교만을 떨었다.

부귀영화와 출세를 구하는 자들의 모습도 이와 같을 텐데, 군자의 도리로서 이를 지켜본다면, 이런 자의 아내와 첩인들 서로 부끄럽게 여겨 마주 보고 울지 않을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맹자> 이루하편 33장

당시 사회상을 시장이나 사랑방에서 서민들이 하는 말을 통해 풍자한 글로 평범한 삶의 풍경에서 예리한 진실을 끌어낸 명문(明文)이다. 조조, 유비, 손권이 천하를 두고 이합집산하면서 패권을 다투던 후한(後漢) 말의 혼란 속에 환관을 비판했다가 일가족을 잃고 숨어 살아야 했던 조기(趙岐, 108?~201)는 이런 상황에 영합하지 않고 맹자를 깊이 연구했다. 그는 이 글을 읽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지금 부귀를 구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마음이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어두운 밤중에 애걸하며 이것을 구하고 대낮에는 사람들에게 교만하고 있으니 여기서 말한 제나라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늘이 낸 천작(天爵)을 잊은 인작(人爵)은 패가망신

지금의 우리도 정·관·학계 등 도처에서 출세를 위해 비굴하게 처신하면서도 그것이 마치 정상이고 관행인 양 고개를 똑바로 들고 활개 치며 도리어 남을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당나라 후기의 임재의현(臨齋義玄, ?~867) 스님은 수처작주(隨處作主)란 말씀을 남겼다. 이 말은 임재 스님을 상징하는 말로 남아 현재까지 널리 전해지고 있다. 뜻을 해석해보면 '어디 가서든 어떤 처지에 있든 주인이 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인이 되란 말은 장관이 되고, 장군, 사장, 시장, 의원 등 높은 자리에 올라 주인처럼 명령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재산과 부동산의 주인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와 입장에 처해도 먼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라는 의미이다. 좀 더 출세하기 위해서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는 사람, 주위를 살펴보고 세에 눌려 시비를 가리지 않고 적당히 처신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주인이 아니며 주인이 될 수도 없다. 먼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자유자재(自由自在)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이 스스로 상황과 처지의 노예가 되길 자처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살펴볼 일이다. 우리도 어느새 저와 같이 무덤가를 배회하는 제나라 사람처럼 될지 모른다.

사람 중엔 하늘이 내린 천작(天爵)을 품은 사람도 있고 노력하여 인작(人爵)을 얻은 사람도 있다. 천작이란 인의(仁義), 충신(忠信)과 선도(善道) 행하기를 즐거워하여 이를 게을리하지 않아 주위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어 조화롭게 사는, 하늘이 내린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이지만, 공경(公卿)과 대부(大夫)같이 지금으로 치면 장·차관, 국회의원, 시장 등의 높은 벼슬은 사람이 내린 벼슬이므로 인작이라 부른다. 천작을 수양한 결과로 자연스럽게 인작이 따라와야 하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천작은 관심 없고, 인작만을 추구하는데 정신이 없다. 이미 인작을 얻고서도 인간사회의 기본이 되는 천작마저 버리고 있으니 이것은 사리에 미혹된 것이 아주 심한 것이다. 이렇게 살다 보면 끝내는 반드시 인작마저도 잃어버리고 패가망신하게 되는 것이다. <고자> 상 16장

권력으로 힘 있는 사람, 또 자신의 이익에 함몰하여 공동체를 저버리는 사람들은 읽고 깊이 생각할 일이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출처 : 인천일보(http://www.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