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한국 현대미술평론 개척자이경성 선생을 추모하며

  • 날짜
    2009-12-03 09:42:00
  • 조회수
    1105
한국 현대미술평론 개척자이경성 선생을 추모하며
●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추모사

선생님의 부음을 받고 마음이 비장해져 책장 문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의 저서 `한국 근대 미술연구`를 비롯해서 여섯 권의 책이 나란히 꽂혀있고, 옆으로 `석남미술상 20년`과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발간한 석남 이경성 미수기념 논총 `한국현대미술의 단층`이 보였습니다. 저는 모란미술관 첫 번째 미술집 `석남(石南)이 그린 사람들`을 끄어냈습니다. 고향 인천을 사랑하고 선산이 있는 동네 이름 석남을 자신의 아호로 정하며 항시 인천을 품에 안고 살아오신 소박한 성품과 선생님의 `사람`으로 이어지는 미술 세계를 다시 보기 위해서입니다. 더구나 이 책은 첫 장에 선생님이 친필로 `지용택님에게` 하고 서명한 귀한 책입니다. 아마도 이때 선생님은 달관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과 만물을 `님`으로 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작품은 검은 먹으로 범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기도 하고, 각자가 뛰어다니기도 합니다. 또 원무를 추는 듯하지만, 항시 홀로 하는 고독이 배어납니다. 때로는 오선지 위에 군상들이 고개를 숙이고 삼삼오오 걷고 있으나 소리는 없습니다. 아마도 고독이 너무 깊어서 소리를 삼킨 듯합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문외한 인 제가 감히 해석하려 들다니 참으로 무례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선생님의 고독을 일찍이 이해하고 모시지 못한 제 과오를 뉘우치는 것이므로 용서 바랍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내가 왜 사람을 많이 그리는 줄 아나?`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제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사람이 그리워서야.` 더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선생님의 저서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중 `노경의 독백`에서 `많은 실어증이 엄습해 오지만 단 한 가지 내가 귀중하게 간직하는 것은 인간성이고, 인간성의 상실로부터는 끝까지 지켜 나가고 있다. 오늘날 기계화된 현대 문명 속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많은 사람이 인간성을 상실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성 상실 때문에 세상은 험악해지고 삶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실성을 지니고, 성실성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고독을 동반하는지를 나이 들면서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사람을 그리고, 또 그리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떼를 쓴 적이 있습니다. 인천 출신의 천재 조각가 조규봉 선생에 대해서 옥고를 부탁했습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평양에 갔는데…` 하고 퍽 신중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생사를 알 수 없는 분인데, 선생님이 아니면 그 분의 내력을 알 길이 없습니다. 후학을 위해서 집필하셔야 합니다.`고 또 떼를 부렸습니다. 선생님은 새얼문화재단에 `인천이 낳았으나 인천이 잊어버린 비운의 조각가 조규봉`이라는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황해문화 1997년 겨울 초에 실렸는데 저는 이 글의 내용을 보고 놀랐습니다. 선생님은 이 글을 쓰시기 위해서 조규봉 선생의 모교인 동경미술대학을 찾아가서 조 선생의 초기 작품이지만 일본문전(日本文展)에서의 특선작 `나부`의 사진을 구해오셨으나 조규봉 선생의 사진은 구할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 하셨습니다.

옛날 잊혀진 옛날, 청년시절 동고동락했던 옛 선배의 실적을 찾아내기 위해서 일본까지 가시다니, 이것이야말로 학문의 열정이며 인간 성실성 그 자체라고 생각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숙연해집니다. 그래서 인천사람들은 조각가 조규봉 선생을 알게 되었고 `인천인물 100인`이라는 책에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이 글을 집필하시고 25년 후 `아름다움을 찾아서`란 저술을 남기셨는데 미술가 편력편에서 선생님은 평생 가까이 하신 분들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록하셨습니다. 첫 번째 조규봉으로 시작해서 이응노, 박생광, 김환기, 이세득, 김정숙, 박남준, 전성우, 최종태, 최재은, 이영범으로 끝이 납니다. 여기서도 `옛 선배를 생각하고 그 분의 작품성을 크게 인정하고 계시구나` 생각했습니다.

한국고미술의 태두 우현 고유섭 선생의 동상을 새얼문화재단이 시립박물관에 세우기 18년 전, 선생님은 인천의 여러분들과 뜻을 모아 우현 선생님 30주기 추모비를 세웠는데 지금은 동상과 함께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일제 말기 어려운 시절 개성부립박물관장인 우현 선생을 찾아뵙고 사사한 애틋한 정을 잊지 못하여 추모비 건립에 앞장선 것으로 압니다. 선생님이 저술한 책 여러 곳에 `나에게 이제 남은 것은 미술을 사랑하고, 미술 속에 살아가고, 또한 미술 속에 죽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뇌까리는 것은 `미술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술을 진정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라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찾아서 걸어온 나의 여정은 자연, 인간 그리고 세계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선생님은 자신의 삶과 철학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말씀처럼 살아오셨고 또한 후학들이 깊이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해방 직후 어려울 때 선생님은 인천에서 한국 최초로 시립박물관을 설립하시고 10여 년을 관장으로 재직하시면서 황무지를 개간하듯 험난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제 후학들은 선생님이 심혈을 기우려 터를 닦은 그곳에 선생님의 흉상이라도 모시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은근한 미소와 멋진 모습을 다시 뵙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면서 두 손 모아 합장합니다. 편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