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도시공동체를 되묻다

  • 날짜
    2010-11-10 10: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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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4

<인천발전연구원 기조강연>

도시공동체를 되묻다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0. 들어가면서

『논어(論語)』의 내용이 지금 현세대에 모두 맞는 고전은 아니지만 아직도 동양철학의 비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명론(正名論)’이 있는데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이름(名)이 바로서야(正) 논(論)과 명분(名分)이 정연해진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이 말에 크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사이 브랜드(brand)라는 말이 너무나 많이 사용되고, 심지어 남발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브랜드란 말의 본디 뜻은 가축에 화인(火印)을 새기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것이 상표의 근원이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상품에 상표를 찍고 붙이는 현상을 낳았는데 본래 제조가 아니라 소유의 개념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이것이 좀더 발전해서 1876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상표등록기관이 성립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학문간 통섭(通涉, Consilience)이란 좋은 것이지만 경영학에서 쓰이고 있는 전문용어인 브랜드란 말을 아무런 비판과 고민 없이 인문학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국가와 도시에 브랜드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브랜드란 말이 한 발 더 나아가서 명품도시란 말과 병행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서울 외곽도시를 비롯해 전국의 어느 도시를 가든 이제 ‘명품도시(名品都市)’란 말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요?

도시는 사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일 뿐만 아니라 당혹스럽기까지 한 일입니다. 아무리 좋은 인프라와 문화시설을 갖춘 도시라 하더라도 사람이 사라진 도시라면 틀림없이 유령도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명품도시라고 선전합니다. 저는 이것이 고의가 아닌 무의식적인 표현이라 하더라도 결국 사람을 물건으로 격하시키는 천박한 의식을 표현하는 것에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장인의 손길이 깃든 값비싼 명품이라고 하더라도 물건은 물건이고, 시간이 흘러 유행이 변하고 시들해지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대화를 하면 할수록 연륜이 깊어지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신뢰가 쌓이고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인정을 나누고 공동체를 형성해나가야 하는 도시를 물신주의(物神主義)에 빠져 명품도시라고 칭하는 것은 결국 철학의 빈곤과 부재에서 오는 경박한 처신에 불과합니다.

저는 얼마 전 상해 EXPO를 두 차례에 걸쳐 다녀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EXPO를 세계박람회라고 하는데 줄여서 ‘세박회(世博會)’라고 합니다. ‘2010 상해세박회’가 정식명칭인 셈입니다. 주최 측에서 펴낸 소개책자를 살펴보니 상해세박회는 “아름다운 도시, 행복한 생활”을 주제로 한 도시 EXPO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바를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이른바 ‘명품도시 상해’라는 표현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행사의 엠블럼(emblem)은 ‘세상 세(世)’를 형상화한 것으로 세 사람이 손을 서로 합쳐 껴안고 있는 듯한 ‘世’자의 모양은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뜻하고 더 나아가 ‘너, 나, 그’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인류를 추상적으로 의미하며, ‘이해 ․ 단합 ․ 소통 ․ 협력’의 이념과 2010년 중국 상해 EXPO가 인간을 근본으로 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추구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위의 글은 중국 당국이 자신이 제작한 엠블럼에 대한 해설인데 여기 어디에도 명품은 없고 ‘인간존중, 인간근본’을 대명제를 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마스코트는 ‘해보(海寶, 하이바오)’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세계의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한자의 ‘사람 인(人)’을 핵심적인 아이디어로 삼아 중국문화의 특징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상해 EXPO의 엠블럼의 디자인 이념과도 부합됩니다. 서로 받쳐주는 ‘人’자의 구조는 아름다운 생활이 너와 나의 공통적인 이념에 의존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직 전 세계의 ‘사람’들이 서로 받쳐주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조화를 이루어야만 사람들이 도시생활을 보다 아름답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도 도시는 사람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마스코트라는 외래어보다는 ‘길상물(吉祥物)’이라 부르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상해 EXPO의 일일 수용 관람객이 삼사십만으로 되어 있는데, 중국관은 일일 관람객이 사만 명으로 제한되어 중국관 입장하기가 기다리는 시간과 함께 매우 힘들었습니다. 중국관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동방지관(東邦之冠)’입니다. 옛날 같으면 동방의 면류관이란 뜻이니 동방의 황제 아니면 맹주란 상징성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상해 EXPO는 중국이 아시아와 세계에 중국의 위세를 널리 펼쳐 보이는 행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짠물론

연수구 해변가에 능허대(凌虛臺)가 있습니다. 허공을 차고나가 바다를 넘는다는 당찬 이름입니다. 이곳이 바로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뱃길의 시작이었습니다. 소박하게 말하면 포구였고, 거창하게 말하면 항구였습니다. 그래서 속설에는 산동성의 개가 짖고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전해옵니다. 이것은 그만큼 중국과의 왕래가 빈번했다는 뜻일 것이라 해석해 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인천을 항구로 축조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천에도 오래전부터 토박이들이 살아왔지만 전국에서 일거리를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목도꾼이 될 수 있는 건강한 체력만 있다면 누구나 바다를 막아 제방을 높이고 축대를 높이 쌓아 물막이를 하고 준설도 했습니다. 기숙사 같은 판잣집에서 초막이라도 내 집을 마련했고, 더 고생하고 일하며 좀더 나은 집을 짓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고 교육에 성심성의를 다했습니다.

생활이 근검절약이요, 이것만이 험난한 생활의 탈출구였습니다. 그래도 일제하에서 독립운동하던 지사들이 인천에만 가면 잘 곳과 노잣돈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당시의 어른들은 말씀하곤 했습니다. 이 얼마나 훈훈하고 어려운 일을 해낸 것입니까? 근검절약과 ‘짠물’은 차원이 다릅니다.

6.25전란 이후 남하한 피난민들은 인천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공업시설과 제조시설이 없던 시기에 인천에는 군수물자와 원조물자의 집하장인 인천항이 있어 생활의 근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그분들의 말로는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서울이 가깝고, 통일만 되면 언제나 들어갈 수 있다는 망향심(望鄕心)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분들(피난민)은 고향의 문전옥답을 놓고 나온 분들이라 처음에는 절망하고 다음에는 전쟁이라는 상황인식에서 힘들어도 궂은일부터 시작해 근검절약으로 생활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인천의 많은 학생들은 서울로 열차를 이용해 통학했습니다. 서울에 기거하며 유학하는 학생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 열차의 맨 뒤 두 칸은 생선 대야 아주머니들의 차지였습니다. 그때에는 용산에 생선도매시장이 생기기 전이라 어장에서 생선을 싸게 받아 서울로 팔러가는 것입니다. 생선 냄새가 진동해서 학생들은 뒤 칸에는 가지 않았지만 이 얼마나 역동적인 생명의 현장이며 자랑스러운 모습이었습니까. 어렵지만 이렇게 해서 아이들을 열심히 교육시키고 집을 조금씩 키워나가며 이 터에 정착한 것입니다. 이것은 짠물이 아니라 근검절약의 뿌리이며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인천이 짜다는 말은 과거에는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농담 삼아 한 말씀 더 드리면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당구가 한창 성행했을 때 당구장에서 내기 시합을 하면 인천 사람들이 많이 이겼다고 하던데 어쩌면 그것이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천의 바닷물과 연관해서 나온 합성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오직 소금의 짠맛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고유한 느낌이 있는 도시 공간(마르크 오제)” 이 장소이며 그것이 인천인데 이곳에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2. 해불양수(海不讓水)

저는 인천을 ‘해불양수(海不讓水)’의 상징과 같은 도시라고 말하곤 합니다. 초(楚)나라 사람이자 진나라에서 벼슬한 사람으로 이사(李斯)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당시 외지 출신으로 진나라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을 일러 객경(客卿)이라 했는데, 진나라의 객경 중 몇몇이 불미스런 일에 연루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진시황은 타지 출신의 신하들을 모두 의심하여 이들을 추방하라는 결정을 내립니다. 흔히 춘추전국시대라고 묶어서 말하곤 하지만 전국시대는 춘추시대 보다 더 혼란스러운 시대였기 때문에 문벌이나 출신 계급보다 실력이 우선됐고 실력 있는 자들은 자신을 고용해줄 제후들을 찾아 주군(主君)으로 모시곤 했습니다. 그런 와중이었기 때문에 남몰래 경쟁국가에 대한 첩보전이 심해서 타국 출신의 신하들인 객경들은 자칫하면 첩자로 몰려 옥에 가두어 죽이거나 추방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당시 진나라의 승상이었던 이사 역시 초나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추방당할 형국이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진시황에게 객경들을 내쫓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문을 올리는데 이것이 명문장으로 유명한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입니다. 이 글 중에서 중요 핵심이라 생각되는 구절을 소개해보겠습니다.

泰山은 不辭土壤이라 故로 能成其大하고

河海는 不擇細流라 故로 能就其深하고

王者는 不却衆庶라 故로 能明其德이니이다.

이것을 풀어보면 “태산은 한 줌의 흙덩이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큼을 이루고, 하해는 가는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깊음을 이루고 왕자는 백성들을 물리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덕을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진시황은 이 글을 읽고 나서 자신의 과오를 깊이 깨닫고 진나라를 떠나는 객경들을 다시 불러 모았습니다. 진시황이 추진한 정책들 중 한자의 간소화, 도량형(度量衡)의 전국표준화, 전국도로망 개척 등은 모두가 이사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으로 『사기(史記)』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훗날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기초는 이때 다져지기 시작한 것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자주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글로벌리즘(Globalism)이지만 중국에서는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하나의 글로벌 시대를 구가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해불양수’를 생각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토박이들과 분쟁 없이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의 개성을 살려 『논어』 자로편에 보이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으로 살아왔다고 하겠습니다. 인천에 와서 자식을 낳고 뿌리를 내리고 인천 사람으로 살겠다고 한 사람은 능력에 따라서 고향을 묻지 않고 시의원도, 국회의원도, 시장도 당선시켰습니다. 그러나 인천에 본집(부인과 아이들이 사는 집)이 있고 출퇴근이 힘들어 여의도에 셋집을 얻은 사람은 좋아도 서울에 본집이 있고, 인천에 셋집을 얻어 산다면 이야말로 정치적 위장전입이라고 해야 합니다.

인천에 사는 사람들이 예전과 달리 인천의 참 일꾼이 누구인가의 기준이 점점 밝고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선출직에 있는 사람들은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본집이 서울인 선량들은 낙선하면 인천 시민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여 재기를 모색하는 대신 자신을 선출해주었던 이 고장을 버린 사례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3. 황해를 넘어 물류를 타는 인천

과거 50년 인천은 38선 서북쪽으로 막힌 버려진 도시였습니다. 남북전쟁의 상흔으로 북한은 적국이 되고,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대륙 중국은 죽의 장막이고, 또 미소 냉전의 주요당사국인 소련과 소통하기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인천은 한반도의 단전, 중심에 있으면서도 주어진 역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에 의해 중국은 죽의 장막을 거두고 세계와 적극적인 교류협력에 나서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소련도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펼치며 수구적인 냉전의 틀에서 벗어나 마침내 한 ․ 소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금강산이 열리고, 개성공단이 조성되는 등 냉전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한반도에 해빙기가 찾아옵니다.

여기에 세계 최고의 공항이라고 찬사를 받고 있는 인천국제공항의 개항과 경제자유구역이 인천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인천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통일은 어려워도 남북이 사람과 함께 물류의 소통이 활발해지고 개성공단이 확대되면서 여기에서 나오는 물품이 서울이 아니라 개풍군을 거쳐 강화 인천으로 직접 이어지고 진남포의 화물이 인천항으로 들어온다면 오랜 세월 닫혔던 황해가 다시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은 인천이 남북 평화 정착의 시발점이 되는 날이며 인천은 평화의 역동적 현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천 강화 출신인 죽산 조봉암 선생은 골육상잔(骨肉相殘)의 6.25전쟁이 남긴 상처를 차마 볼 수 없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평화통일을 주창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제 평화통일은 단순한 국내문제가 아니라 이미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끼리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통일이 제2의 민족독립이 될 것이란 뜻입니다.

만약 북한에 대한 외부의 압력이 심해지고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면 중국을 중심으로 기울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예측할 수 있을 만큼 너무나 명백한 현실입니다. 만약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남북한 통일문제가 우리 민족의 손을 떠나 국제문제로 비화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 상황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백범 선생이 중경에서 독립군을 훈련시켜 드디어 조선 진공작전을 펼치려 할 때 갑작스럽게 일본의 패망 소식이 들려오니 등 뒤에서 폭탄이 터져도 놀라지 않았던, 그 담대한 선생께서 땅에 털썩 주저앉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 우리는 어떻게 하지. 우리는 어떻게 하지”라며 한탄을 하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독립을 위해 무력투쟁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과연 발언권이 있겠는가?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이, 우리 민족의 해방이 우리 힘만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타의에 의한 조국의 분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남북문제와 평화통일에 있어 국제적인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정부와 우리 인천이 해야만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천의 발전과 평화적인 통일 분위기의 조성은 떼어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숙명적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화통일을 위한 국민운동과 함께 시민운동으로서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현재 우리 민족이 처해있는 당면과제인 분단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제2의 분단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4. 인천의 인물들

해방 이후 한국 정계를 크게 움직인 인물 중에는 조봉암, 장면, 곽상훈 등 세 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조봉암은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면 도전해 한 번은 실패했으나 또 한 번은 투표에서는 이기고 개표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장면은 4.19 이후 내각 수반이 되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실각하고, 곽상훈은 국회의장이 됩니다. 이렇게 인천은 여당에 철저하게 대립한 야도(野都)였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지원받기는 어려웠습니다. 학계에서는 한국 고미술학의 태두 고유섭이 있고, 이화여자대학교 초대총장을 역임한 김활란도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신태환, 3․4대 대법원장(8년 동안)을 역임한 조진만, 또 현대미술의 논단을 개척하신 이경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 장발과 유체공학 분야의 장극 같은 과학자도 있었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한 정치인 이승엽, 조각가 조규봉, 평론가 김동석, 극작가 함세덕, 소설가 현덕 등은 여기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군사정부가 집권한 이후 인천에서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중국이 활짝 문을 열고 소련이 냉전의 축에서 벗어나 남북이 전보다 유연하게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되면서 인천에는 인구도 늘고, 선거구도 늘어 국회의원 수가 12명이 되었습니다. 재선도, 3선도, 4선 의원도 생겨났지만 인천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없으며 중앙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은 더욱 없었습니다. 따라서 인천 시민들 가슴속에는 은연중에 인천에서도 조봉암이나 장면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 나오기를 갈구하는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남북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물류가 활발해질수록 인천은 더욱 번성하고, 우리가 원하는 큰 인물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도 함께 만들어지리라 기대합니다. 여기에 좀더 덧붙여 말해보면 제가 35년 전 인천의 정체성과 인천 사람들의 응집력을 내걸며 새얼문화재단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인천에 관계되는 단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인천시에 200여 개의 단체들이 저마다 ‘인천’을 내세우고 환경 ․ 복지 ․ 경제 ․ 미술 ․ 음악 ․ 문화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중에는 내실이 있는 단체들도 있고, 이름만 걸어놓고 있는 모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인천을 앞에 내세워야 된다는 의식이 우리 시민사회단체에 일반화된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가 모두 동창회 활동을 내 일처럼 활발히 하고 있는 것도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하고, 격려할 만한 일입니다. 근래에는 부모의 고향은 다르지만 그 자제들이 모임을 갖고 인천을 위한 대화와 협력을 하고 있고, 조직 체계를 잡아 활발하게 움직이는 단체로 키워가고 있는 현상들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천의 정체성과 응집력을 통하여 인천의 인물을 성장시키는 데 생명력 있는 터전이 될 것입니다.

5. 맺으며 남기는 덕담 한 마디

‘신은 천국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발명했다. 도시는 인간이 만든 천국’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시는 사람이 사는 환경이며 하나의 생태계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찾아오는 도시, 살고 싶은 도시가 천국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도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도시 브랜드에 대해 지금까지 비판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있어 한 마디 덕담삼아 보태보고자 합니다. 근대 개발중심의 시대에는 항만, 공항, 도로, 공장, 아파트 같은 도시 인프라를 도시의 가장 중요한 하드웨어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부터 도시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축적하고 창조해낸 문화나 예술 같은 소프트웨어가 도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저는 앞서도 말했던 것처럼 경영학에서 유래했을 법한 ‘도시브랜드’라는 용어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이것이 도시를 하나의 그릇으로서 컨텐츠웨어, 도시가 무엇을 담아낼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도시라는 시민의 도가니,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이 대목에서 저는 역설적으로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됩니다. 좋은 도시란 높은 빌딩, 값비싼 아파트가 즐비한 곳이 아닙니다. 이 고장에서 작지만 자기 역할이 있고 보람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대화가 있고, 도시구성원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긍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찮은 일들이 쌓여 문화가 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인천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을 느끼며 황해를 되찾는 삶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작은 노력이 우리 인천을 그릇이 아니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탐구하는 그런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