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죽산의 무죄판결이 내려진 대법정에서

  • 날짜
    2011-01-27 09:04:03
  • 조회수
    947

죽산의 무죄판결이 내려진 대법정에서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지용택

북의 간첩이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산이 쓰러지고 52년의 성상(星霜)이 흐른 2011년 1월 20일 오후 2시. 대법정 안의 공기는 너무나 엄숙하고 무거워 차라리 적막할 지경이었다. 나는 그 적막 속에서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의 최후를 떠올렸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10시 30분, 법무부 장관은 죽산 조봉암 선생의 사형을 명했다. 명령이 떨어지고 불과 30여 분 뒤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서대문교도소 사형장에서 의례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죽산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죽음이라는 절박한 순간 앞에서도 태연히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자는 내가 마지막이길 바랄 뿐이오.”라고 했다.

그는 입회한 목사에게 마지막으로 『성경』의 루가복음 23장 22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빌라도는 세 번째로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에 처할 죄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 사람을 매질이나 해서 놓아 줄 생각이다` 하고 말하였으나 무리들은 더욱 악을 써가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 질렀다. 마침내 그들의 고함소리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겠다고 선언한 다음 폭동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던 바라빠는 그들의 요구대로 놓아 주고 예수는 그들 마음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죽산은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당하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떠올렸던 것인지 모르겠다. 예수의 죽음으로 신약의 시대가 열린 것처럼 죽산의 죽음으로 이 땅에 평화통일의 씨앗이 뿌려졌고, 이 나라 시민들의 가슴속에 뿌리내린 죽산의 평화통일정신은 이후 50여 년의 심한 격랑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이용훈 대법원장과 주심을 맡은 박시환 대법관을 비롯한 13명의 대법관이 법정으로 들어섰다. 죽산의 무죄를 확신하며 억울하게 죽어간 그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온 이들에겐 52년의 세월 보다 그 몇 분이 더 견디기 어려운 초조와 긴장의 순간이었다. 드디어 대법원장의 “망 조봉암. 국가변란혐의 무죄! 간첩혐의 무죄! 불법무기소지 선고유예!”란 판결문 낭독이 시작되었다. 본래 전원합의체 판결이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례를 남길 수 있는 판결에서 법관 일부의 소수의견도 기록에 남기기 위해 만든 절차였다. 죽산 선생의 무죄 판결은 소수 의견이 없는 전원일치의 결과였다.

심장이 진동하고, 가슴이 벅차올라 귀에 들리는 소리들을 모두 담을 수는 없었지만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이 대한민국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 피고인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건국에 참여하여 제헌국회 의원,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의 토대를 마련해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판결문 내용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독당마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할 때 제헌의회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당성에 힘을 실어 주었고, 제헌의원을 비롯해 두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어 국회 부의장, 제2대,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맞섰던 소신과 대중의 염원을 담아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도 ‘제3의 길’인 사회민주주의를 제시했던 정치인이었다.

어떤 이들은 죽산을 일컬어 여전히 공산주의자로 오해하고 있지만 조봉암 선생은 「나의 정치백서」에서 자신이 조선공산당에서 제명당한 이유는 당시 조선공산당이 소련의 지시대로 움직였던 데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인천 을구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어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입지를 크게 넓혀주었고, 진보당의 통일정강정책에서도 평화통일의 선행조건으로 “6․25의 죄과를 범한 북한 반성과 책임 규명”을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근래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두고 우리 정부는 대화를 요구해온 북한에게 우선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데 진보당 역시 6․25전란에 대한 북측의 사과를 이미 50여 년 전에 명확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의 정당성은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또한 죽산 선생은 「나의 정치백서」에서 진보당의 정책에 대해 “공산독재도, 자본주의 독재도 다 같이 거부하고 인류의 새 이상인 진보주의 진리를 파악하고 만인이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복지사회(국민의료제도․국민연금․초등교육부터 최고학부까지의 점진적 국가보장제)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복지를 논의하고 있는 우리 여야정당들의 정책과 비교해보더라도 당시 죽산과 진보당의 정책은 비록 당시 경제수준으로 보자면 선언에 불과할지라도 얼마나 선진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죽산이 사형되기 2년 전에 주장했던 것이니 선생의 대중의식이 얼마나 탁월했는가를 알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정적을 탄압하고 압살하기 위해 진보당을 불법화했고 끝끝내 죽산을 간첩으로 몰아 죽였던 것이다.

법정에서 죽산의 무죄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윤길중, 신도성, 이동화, 박기출, 김달호, 조규희 등 죽산과 뜻을 함께 했던 쟁쟁한 지식인들, 맹장들이 떠올랐다. 죽산이 일제에 항거해 투쟁했던 독립투사, 대한민국의 진정한 건국 주역으로 대한민국 역사에 새롭게 기록되는 순간이었지만 저들 중 누구도 이 순간을 함께 할 수 없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법정에는 죽산의 장녀 조호정 여사를 비롯한 유족들과 남재희 선생과 죽산 추모 사업을 이끌어 왔던 김용기 선생, 곽정근 사무총장 등 원로들의 얼굴만이 친숙하다.

다행히 인천의 뜻있는 젊은 기자들 정진오, 유승희, 김칭우 기자와 인천일보 박영권 사진부장 등이 매서운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취재에 나서주었고, 특히 멀리 강화에서 오신 분들이 자리를 지켜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무죄판결 다음날이었던 1월 21일 인천의 조간신문마다 죽산의 무죄판결 소식을 일면에 대서특필해준 것은 인천 언론의 긍지이자 인천 시민의 높은 의기가 살아있다는 증표가 아닐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와 같이 역사적인 순간, 인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치인들 중 한 사람이라도 법정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미더운 마음이 들었을지 모르겠다. 이런 사실을 의식 있는 시민들이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죽산 조봉암 선생은 이미 백 십여 년 전 인천에서 태어난 어른이다. 그의 정강정책은 이제 여야 ․ 보수와 진보를 떠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치이다. 삼국시대 통일을 위해 피 흘렸던 계백 장군과 김유신 장군을 두고 누가 옳고 그른지 따지는 것이 역사적으로는 몰라도 현실적으론 무의미한 것처럼 이제 우리는 앞선 시대에 자신이 맡았던 역할과 책임을 목숨을 바쳐가며 치열하게 이루어낸 죽산 조봉암 선생의 삶과 유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슴깊이 솟아오르는 만감과 함께 대법정을 떠나며 이제야 우리는 죽산의 묘비에 그리고 우리 가슴에 새길 역사적 의의를 얻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일보 2011. 1. 27.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