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중국을 다시 생각한다

  • 날짜
    2013-11-04 16: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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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람들 입장에서 아편전쟁은 끔찍한 파국이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중국현대사는 개혁과 좌절, 혁명과 절망에 맞서 포기하지 않고 또 끊임없이 일어나는 대륙적 기질이 발휘되는 한 편의 다이내믹한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중국 민중운동의 시작, 5·4운동
국민당을 이끈 장제스(莊介石, 1887~1975)에 맞서 마침내 중국 통일에 성공한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투쟁과 저항을 제외한다면 나는 중국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5·4운동’을 높이 평가한다. 5·4운동은 1919년 5월 4일 베이징 대학생들이 시작한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5천여 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궐기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시민, 노동자들이 여기에 동참해 당시 베이징 군벌정권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최초의 학생운동이자 시민운동이라는 의의가 있으며 외세에 대한 저항 정신, 독립과 자유에 대한 민중의 갈망이 하나로 단결된 자율적인 궐기를 통해 일어났다는 점에서 민중의 각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만천하에 고하는 개국을 선언하며 수립된 공산정권 하에서 민주인사와 지식인들이 자신의 주장을 높이 세우는 동시에 베이징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1957년 5월 19일 베이징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학교 담장에 자신들의 요구를 담은 의견서를 붙여 공산당 정부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른바 ‘민주의 벽’을 만든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의 수많은 대학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당시의 사건을 칭하여 ‘5·19민주운동’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청년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사상해방을 쟁취한 계몽운동’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변화를 촉구하는 사회주의와 민주정치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사상운동이면서 정치운동으로서 40년 전 베이징 대학을 발원지로 했던 5·4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989년 4월 15일 전(前)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 4. 15)의 갑작스런 사망을 추모하기 위해 시작된 가두행진이 곧 정치개혁과 노동자 권익 보호 그리고 부정부패한 관리의 엄단을 요구하는 전면적인 시위로 바뀌었던 이른바 ‘천안문 사태’이다.

민중은 과감한 힘을 보여주며 6주 동안 천안문 광장을 장악했다. 1989년 6월 4일 무장군인들이 총칼로 진입하기 위해 들어올 때 용감한 시민이 홀로 두 손을 들어 탱크 앞을 막아섰던 위대한 광경을 우리는 보도사진을 통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무력으로 진압된 이 엄청난 비극은 비단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류에게도 지울 수 없는 불행한 기억으로 남았다. 천안문 사건은 5·4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민중의 자율적 운동이며 자유의 함성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5·4운동, 5·19민주운동, 천안문 사건이 민중의 가슴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밑바탕에 깔린 정신은 외세의 강점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출발한 중국 민중의 자각이 신중국 수립 이후에는 사상의 해방과 자유,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시민운동으로 승화되어 이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마오쩌둥 시대의 정치운동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3년 전인 1989년 가을 난생 처음으로 중국 대륙의 관문인 상해에 첫 발을 내딛었던 순간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명색이 국제공항이었지만 공항 내부는 텅 비어 있었고, 그 커다란 공간에 간혹 트럭들도 보이긴 했지만 주로 자전거가 오갔으며 말이 끄는 마차가 짐을 나르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순서대로 통관 절차를 밟아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접수대에 앉은 직원들의 복색은 황색, 청색, 검정색으로 단조로웠고, 외국인을 대하는 그들의 낯빛과 눈동자는 딱딱하게 굳어 있어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스스로 주의하게 되었다. 얼마 전 일어났던 천안문 사건의 여진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에 그토록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였을까.

건국 초기 체제 안정의 기초를 마련해야 할 중국의 입장에서 정부 수립을 선포한지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6·25전쟁에 비록 원조항미(援朝抗美)의 기치를 들어 참전하긴 했지만 중국 역시 많은 어려움과 사회불안을 겪어야만 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지속적인 반우파 투쟁을 통해 치국의 근간을 수립하고자 했다. 즉 간단없는 대규모 군중운동을 발동시켜 계급투쟁과 국가건설을 진행시켰으며 군중독재를 실행하였다. 1958년 대약진운동, 인민공사운동, 1959년 반우경기회주의자 운동을 병행했다. 이 시기는 3년이나 계속된 대기근으로 민중의 삶이 수많은 고초 속에 놓여 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1962년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계급투쟁을 이야기하자(階級鬪爭天天講 月月講)”라며 2년 동안 사청운동(四淸運動 정치·경제·조직·이념을 깨끗이 만들자)을 전개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문화비판운동으로 발전시켜 1966년에 시작된 문화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정치를 실행하고자 했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시작한 이 정치운동은 이후 20년 가까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고, 지식인들이 피해를 당했으며 문화재들이 파괴되었는지는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도자들은 이 엄청난 과오를 버리지 않고 자신들의 사상과 경륜 속에 녹여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중국의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백승욱 교수는 이 운동에 대해 “중국 민족이 왜 마오쩌둥과 함께 대약진운동을 일으켜야 했는지! 온 민족이 허기에 차 힘들어 하면서도 어떻게 소련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 세계사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독립된 국가로 나아갈 것인지를 함께 부둥켜안고 고민했던 사회배경, 그것은 좌우에서 상하에 이르기 까지 온 국민이 일치된 감정으로 부응한 민족 대장정과도 같은 서사시였다. 비록 그 귀결은 실패한 운동으로 끝이 났으나 한 권의 학술서가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대학원 시절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절감했다”고 말했다. 나는 백승욱 교수의 이 같은 성찰에 공감한다.

개혁개방의 시작, 덩샤오핑
마오쩌둥 시대가 가고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의 실용주의적인 개혁개방 시대가 열렸다.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홍콩대학교 아시아연구센터의 전임연구원이며 광저우에 있는 중산대학교 인문고등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는 간양(甘陽) 교수의 말은 당시의 상황을 좀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80년대에 우리는 모두 개혁주의자였다. 우리는 구태의연한 마오쩌둥주의자의 목표와 관행을 비판했다. 우리는 서구의 사상을 통해 우리의 처지를 살폈다. 우리는 시장이 작동하면 중국이 어떻게 변할지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순진하고 추상적인 생각만을 했다. 우리는 시장이 불평등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오히려 시장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몇 년간은 그랬다.”

중국의 경제개혁은 1979년 농촌에서 인민공사(人民公社)와 집단농장체제를 해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전 20년의 농촌생활이란 집단적인 생산대(生産隊)를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는 것이었다. 생산대는 가정을 대신하는 경제활동과 사회생활의 기본 단위였다. 개혁개방 시기에 들어선 후 이러한 집단농장이 잇달아 폐쇄되고 개별 가정 위주의 소농(小農)체제로 대체되었다. 소농체제의 개별 농가는 자신이 생산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동으로 창출된 이윤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 농민은 향진기업(鄕鎭企業)이라 불리는 민영공장을 운영하거나 여기에 고용되었다.

당시 향진기업은 중국 농촌 전 지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개혁은 중국 농촌에 경제적 부를 가져다주었으며 지방 정부는 민영 기업의 수익으로부터 이득을 챙겼다. 당시의 개혁개방주의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광동성 보안현(寶安縣) 심천(深圳)에 경제특구라는 수출단지를 만들면서 더 빠른 개혁개방을 주도했다. 심천경제특구는 혼자 힘으로 공장을 건설하고, 도로를 포장하고 항구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300억 달러의 외자유치에 성공했다. 심천경제특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성장을 견인하기 위해 내수보다 수출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개혁은 경제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변화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중국인들은 이것을 ‘문화열(文化熱)’이라고 불렀다. 1988년 6월 중국의 주요 국영방송은 황금시간대에 수시아오캉(蘇曉康, 1949~ )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하상(河殤)> 6부작이 방영되면서 이 문화열은 최고조에 달했다. 하상은 중국 사람에게는 ‘어머니의 강’으로 일컬어지며 중국 문명의 요람으로 여겨지는 황하(黃河)를 소재로 중국 전통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가했다. 여기에서 황하는 중국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낭만의 전형(典型)으로 묘사되기보다는 공적(公敵)으로 표현된다. 강의 잦은 범람과 한발로 인해 중국 역사상 무수히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또 황하는 중국인의 불합리하고 변덕스러우며 대륙지향적인 성격을 형성시킨 상징물로 묘사된다. 그 역사적인 예로 해상활동을 금지시킨 명나라의 정책을 비판하고 만리장성을 의미 없는 고립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은 직설적으로 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국민 정서상 우리가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난 세기의 모든 수치가 영광스러운 역사의 쇠퇴나 단절에 불과하다는 막연한 믿음이다. 1840년 아편전쟁의 발발 이래로 현재의 무력함과 낙후성을 감추기 위해 과거의 영광과 위대한 역사만을 줄곧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변함없고 우리의 문명은 소멸직전에 놓여 있다.”

이것은 중국의 현대화를 가로막는 전통사회의 구속에서 벗어나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이제 황하에 집중하지 말고 농촌에서 눈을 돌려 푸른 바다와 바다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상>의 마지막 장면은 황하가 망망한 바다로 유입되고 스며드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이 바다는 아마도 현대화를 상징화한 것이리라.

이러한 사회적·경제적 경향(傾向) 속에서 덩샤오핑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 나오고 선부론(先富論) 그리고 1992년에는 시장의 자유화와 민영화를 주장한 개혁개방세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그 유명한 남순강화(南巡講話)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천윈(陳雲, 1905~1995), 리셴녠(李先念, 1909~1992), 덩리췬(鄧力群, 1915~ ) 같은 당의 최고지도자들은 시장개혁에 반대했다. 급격한 시장의 자유화와 민영화를 실행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실태를 예로 들면서 중국이 소련처럼 계획경제체제를 더욱 현대화하고, 더 과학화하기만 한다면 중국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주장했다. 그래서 덩샤오핑과 그의 지지세력은 중국경제개혁을 위한 청사진이나 시간표를 미리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돌다리를 더듬어가며 강을 건너는 방법’을 택했다. 조금씩 천천히 바꾸고 한 번에 한 걸음씩 나아가되 절대 최후의 목적지는 말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두 점 사이에 가장 짧은 거리는 곡선이라는 경륜에서 얻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개혁파 지식인들의 분화와 갈등 그리고 새로운 비전
1989년까지 개혁파 지식인들은 줄곧 서구식 체제를 향한 여정에서 일치단결했다. 정치와 경제의 자유주의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중국 국민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었다. 그들의 적은 마오쩌둥주의의 현상유지를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1989년 6월 4일 천안문에서의 억압과 유혈 사태 이후 개혁파 지식인들은 양대 진영으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장웨이잉(張維迎, 베이징대학교 광화(光華)경영대학 경제학과 교수) 등이 이끄는 신우파로 자유시장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 반면 정치적 권위주의와는 타협을 선택했다. 또 한 부류는 왕후이(汪暉, 칭화대 인문사회고등연구소 연구위원) 같은 학자가 이끄는 신좌파로 시장의 자유를 다소 희생하더라도 평등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사진-장웨이잉, 왕후이 나란히)
특히 왕후이는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공직에서도 책임자가 될 수 없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읽는 유명한 잡지 <독서(讀書)>의 편집주간이라는 영향력 있는 자리에 10년간 있었지만 2007년 제17차 당대회에서 사전에 어떤 예고도 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왕후이는 중국 신좌파의 사상적 리더 중 한 사람으로 칭화대학 교수이지만 정부당국과는 불편한 관계에 있다. 그는 지방 관리의 부패를 폭로하는 글을 쓰고, 노동자들에게 불법적인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도록 조언했으며 매체를 통해 정부의 무능을 드러내는 일을 해왔다. 그가 신좌파라 불리는 이유는 구좌파와 달리 시장개혁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좌파로 분리되는 원인은 신우파와 달리 불평등 문제를 깊이 우려하기 때문이다.

왕후이는 “중국은 오도된 사회주의와 패거리 자본주의라는 양 극단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두 시스템의 가장 나쁜 면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가가 시장개혁을 향해 가는 것에 대체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발전은 더 평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GDP의 성장에만 집착해서 노동자의 권익과 환경문제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신좌파 학자들은 “신문과 웹사이트에는 당의 거물급 인사가 민영화의 기치 아래 국가의 자산을 처분하고 약탈한다는 기사가 매주 실린다. 부자의 손에서 농민에게 주어졌던 자산이 다시 몰수되어 개발업자에게 주어진다. 부동산 투기업자가 새로운 개발을 할 수 있도록 마을 주민이 살던 땅에서 강제로 이주된다. 공장이 쉽게 처분될 수 있도록 공장의 자산은 최저가로 팔린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부패한 관리와 부정직한 사업자는 하룻밤 사이에 백만장자가 되고 노동자와 토지소유자는 시시한 보상을 받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고 덩샤오핑이 말한 이후 지방 관리에게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경제 성장을 달성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구조가 절대시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성장은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우선시되었다. 반대로 신좌파는 고양이 색깔이 좀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후안강(胡鞍鋼) 칭화대 교수는 지난 20년간의 성장이 모두 검은고양이식의 GDP성장이라고 규정하고, 성장의 측정은 환경파괴로 인해 생겨나는 비용을 공제하고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녹색 고양이식 발전’이라고 부른다.

1980년대 보수파와 개혁주의자 사이의 논쟁은 개혁주의자의 승리로 끝났고 개혁개방노선에 대한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에서 새로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중국은 어떤 개혁을 추구해야 하는가? 누가 개혁의 이익을 가져갈 것인가? 경제 성장으로 생겨난 이익은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

2005년 말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제1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조화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그들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당 관료로 구성된 수십 개 팀이 유럽, 미국, 남미, 동아시아,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각국의 사회정책을 조사했다. 그 결과를 기반으로 제11차 5개년 계획이라는 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는 미래의 경제발전 방향에 대해 중국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197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개혁의 시대 이래 중국 정부로서는 처음으로 경제 성장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 보고서에는 환경을 존중하는 한편 ‘사람을 우선에 둔다’는 의미와 더 넓은 목적에 합의하는 발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제 후진타오의 ‘조화로운 사회’와 ‘과학적인 발전’의 시대가 저물고, 시진핑(習近平, 1953년 베이징 출생~ )의 해가 떠오르고 있다. 시진핑의 앞으로의 10년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중국의 급격하고 화려한 성장에만 현혹되다 보면 고통과 실패마저 버리지 않고 교훈삼아 새로운 비전으로 만들어내는 중국의 저력을 놓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도 좀더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통해 현재를 털어내고 새롭게 일어서는 슬기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매일 아침 새로운 태양이 솟아나듯 희망도, 미래에 대한 설계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하는 때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다. (2012.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