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뱀을 품고 자는 임금

  • 날짜
    2013-03-19 18: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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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국사 일연이 지금으로부터 800여년전에 저술한 <삼국유사>2권 경문왕편은 우리에게도 `임금님귀는 당나귀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저 재미난 야사나 재담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고, 이 이야기가 지금 우리 사회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뜻이 있어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경문대왕은 처음부터 왕의 뒤를 이을 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응렴이며, 희강왕의 아들인 아찬 계명의 아들로서 18세에 화랑들의 우두머리인 국선이 됐습니다. 어느날 헌안왕이 그를 불러 대궐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헌안왕은 응렴의 인품에 감탄해 그의 기지를 시험해보고자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낭(郞)이 국선이 되어 사방을 두루 유람하면서 이상한 일을 본 적이 있는가?` 응렴이 답하길 `신은 아름다운 사람 셋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윗자리에 앉을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겸손하여 다른 사람의 아래에 앉은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이 있고 부자이면서도 옷차림을 검소하게 하는 사람이 그 둘이요. 본래 귀하고 세력이 있는데도 위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이 그 세번째입니다`


헌안왕은 이 말을 듣고 감탄해 자기딸을 응렴과 혼인시켜 자신의 뒤를 잇게 하니 그가 곧 경문왕입니다. 그는 왕의 아들도, 직계자손도 아닌 사람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고대왕국에서 정통성이란 곧 혈연을 의미하는 것인데 성정이 명민하여 왕의 사위가 되고, 왕권을 계승하게 되었으나 이처럼 정통성이 약한 사람이 통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고뇌를 상징하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습니다.
왕이 된 경문왕이 침전에 들어 날이 저물면 어디선가 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궁인들이 놀라 뱀을 몰아내려고 하자 경문왕은 `과인은 뱀이 없으면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하니 금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경문왕이 잠잘 때마다 뱀들은 혀를 날름거리며 왕의 가슴을 덮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뱀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이 그저 해괴한 괴담이 아니라 임금 즉 지도자의 고뇌를 에둘러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음이야기는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갑자기 귀가 길어졌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몰랐지만 복두장, 즉 임금의 왕관과 머리를 챙기는 사람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다가 죽을 무렵에서야 도림사 대숲에 가서 `우리 임금님귀는 당나귀(吾君耳 如驢耳)`라고 외쳤습니다. 그 뒤부터 바람이 불면 대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임금님귀는 당나귀`라고 말이죠. 왕이 그 소리를 싫어해서 대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산수유를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뒤부터는 바람이 불면 `吾君耳長` 즉 우리 임금님귀는 길다는소리가 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왕이 되면 백성의 소리를 듣는 귀가 길어지고, 커져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숨기려고 했으니 국민으로서는 비극입니다.


여기서 느끼는 것은 인간에게는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본능과 알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발없는 말이 풍문, 소문, 또는 여론으로 천리를 간다는 말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대나무 잎사귀를 잘 살펴보면 꼭 사람 혀 같이 생겼는데 그런 숲이 바람이 불면 쉴 새 없이 사각사각 소리내는 현상을 백성의 신랄한 혀(여론)로 상징화했다고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가 뜻하는 바가 참으로 절묘합니다. 젊어서 화랑시절에는 그처럼 밝은 눈을 가진 이도 왕위에 오르게 되니 진실도 외면하게 되나 봅니다.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경문왕처럼 잘못 물리면 죽을 수도 있는 권력을 품에 안고 자는 것이 최고통치자의 자리일 겁니다. 그렇기에 뱀과 같은 고뇌를 안고 밤을 지새우는 지도자가 많아져야 반대로 서민들은 편안히 깊은 잠에 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지금도 밤잠 못자며 나라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이 사회를 끌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왕정이 아니라 민주공화정의 시대입니다. 단지 그 정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지요! 시민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시민도 함께 깨어있어야 바른 지도자를 가질 수 있습니다.

2013년 03월 19일 (화) 인천일보 지면 (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