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역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인천 사람들

  • 날짜
    2013-11-04 16:2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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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을 제대로 안다는 것

인천은 송도신도시와 구도심이 인천의 전체인양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른바 중앙에서 정치, 경제, 문화 분야에 종사하는 지도자급 인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천은 한반도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인천은 경기, 서울의 일원을 거쳐 파주, 개성, 해주 그리고 동양의 지중해라고 할 수 있는 황해 또 남으로는 평택, 당진을 아우르는 이 광역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역시가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인천의 발전이 지체되고 서울의 종속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난 50여 년 간 미군의 원조물자와 군사무기를 수송하여 얻은 임금으로 생활하는 도시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천이 이처럼 쇠락하게 된 까닭은 삼국시대부터 항구로서 기능해왔던 인천의 항구와 물류 거점 중심지로서의 역사적 기능이 정지된 채 남한 서북쪽으로 막힌 도시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1945년 8.15 이후 외세에 의하여 설정된 비극의 38선, 1950년의 참혹한 6.25전란 이후 남북은 단절되고, 더욱이 미소의 냉전기류 속에서 죽(竹)의 장막인 중국 그 뒤에는 철의 장막 소련이 만리장성보다 더 굳게 버티고 있었고 남한은 군사독재정부의 혼돈 속에서 물류를 통한 남북의 교류, 더 나아가 평화통일의 주장은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한 예로 평화통일을 주장한 인천 출신 죽산 조봉암 선생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서 국가변란죄, 간첩죄 등으로 일심에서 무죄이던 것이, 이심에 가서는 유죄, 대법원에서 또한 유죄로 판결되어 1959년 7월 31일 법살되었던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다행히 2011년 1월 20일 사형언도를 받은 그 대법원 대법정에서 국가변란죄 무죄, 간첩죄 무죄, 불법무기 소지죄 기소유예를 판결 받아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틀에서 생을 마감한지 52년 만에 밝은 빛을 보게 된 것은 조봉암 선생 자신 및 그 가족들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만 이 지역의 후학들에게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산 선생이 생환함으로서 평화통일의 선도적, 정신적 기틀이 인천에 뿌리내렸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랴.

인천 시민들은 오명을 벗고 지하에서 돌아오신 조봉암 선생의 동상 조성 기금을 즐겁게 내놓아 엄청난 모급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시정부나 중앙정부 그리고 어느 독지가 개인의 뜨거운 성금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 공무원, 상인, 정치인, 언론인, 상공인, 노동자 각계의 모든 사람들이 앞 다퉈 참여했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여야 정치인, 보수·진보학계, 예술계, 노동계, 경제단체 등 모두가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죽산 조봉암 선생이 이끌었던 진보당을 재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생이 기치를 세운 평화통일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마음이 시민의 정신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인천을 중심으로 쓰인 한반도의 근현대사

조선왕조 후기 개항(開港)기를 전후해서 인천은 한반도의 중심에 있다는 지정학적 위치와 수도와 지근거리에 있다는 조건으로 인해서 새로운 물물과 제도가 인천을 통해 수입되었습니다. 또 외세의 침략과 함께 인천 앞바다는 열강들의 격전장이 되었으며 치욕의 역사가 벌어지는 현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을해왜요(운양호 사건), 강화도조약, 제물포조약, 청일전쟁, 러일전쟁, 6.25전란(인천상륙작전) 등 이 모든 역사적 격변이 인천과 인천 앞바다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아프고 비통한 사실이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이렇게 치열하고 뼈아픈 역사의 현장을 잉태했던 인천이기에 앞으로 인천과 인천에 사는 젊은이들에게는 장엄한 미래와 국가동력의 기본이 될 수 있는 평화통일의 새날을 여는 곳이 바로 이 땅이 될 것이라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병인양요(丙寅洋擾)는 1866년 8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입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8명의 선교사 및 천주교 신자 2000여 명이 서울과 충청도 일원에서 참수된 이른바 병인박해가 발생하자 프랑스인 리델(F.E.Ridel) 신부는 천진(天津)으로 탈출하여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인 로즈(P.G.Rose)에게 박해사실을 알리고 보복원정을 요청했습니다. 같은 해 9월 군함 7척을 이끌고 강화해협을 거쳐 강화 정족산성을 공격하여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습니다. 병인양요는 서양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최초로 격퇴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사건입니다.

신미양요(辛未洋擾)는 1871년 미국 아시아 함대가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에 침입하여 발생한 사건. 1866년 미국 상선이 평양 대동강까지 거슬러 올라와 본래 뜻대로 통상이 성립되지 않은 채 많은 시간이 지나 물자가 모자라게 되자 민간에 대한 총격, 약탈, 살상이 발생했습니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朴珪壽)의 지휘 하에 관민이 합동으로 대항해 배를 소각 침몰시켰습니다.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Rodgers)에게 조선원정을 명하여 강화 손돌목, 광성진, 초지진, 덕진진에서 전투가 발생했는데 어재연 장군과 동생 어재순 및 53명이 전사했고 계속해서 결사항전을 하니 미군은 퇴각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미국 함대의 철수를 미군의 패배로 간주하고 보다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습니다.

을해왜요(乙亥倭擾)란 1875년 9월 일본군함 운양호(雲楊號)의 강화해협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사건. 일본 군함 운양호가 강화초지진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성과를 이루지 못하니 강화에서 인천으로 내려오다 영종진에 침입하여 양민 50여명을 살해하고 퇴각한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이것을 운양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이후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조선 정부에 무력 위협을 가하여 통상을 요구하였고, 1876년 2월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은 1876년 2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정식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이라고도 합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지만 일본의 군사적 압력에 의해 성립된 불평등조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의 제1항은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조약은 일본의 일방적 특권이 명시된 불평등조약으로서 일본의 조선침략의 길을 터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은 1882년 8월 임오군란으로 발생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으로 일본공사관이 불타고 별기군 교관을 비롯한 10여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자 일본은 이에 대해 많은 피해보상과 조선에서의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조선 내의 일본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제물포에 상륙시킨 뒤 협상을 요구하였습니다. 치욕적인 조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청일전쟁(淸日戰爭)은 1894년에서 1895년까지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으로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자 일본도 천진조약을 빌미삼아 일본공사관과 일본 거류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습니다. 그 후 청일 양국 간에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전운이 감돌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청일양군의 동시철병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의 내정개혁을 구실로 철수를 거부하고 동년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한 뒤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친일정권을 수립하였으며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습니다. 인천 앞바다에서 청군을 격파한 일본군은 계속 북상해 승리하였으며 청국 영토로 진격하여 여순, 대련, 위해를 점령했습니다. 1895년 4월 이홍장은 전권대사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을 맺고 조선의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러일전쟁은 1904년에서 1905년 조선과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일본을 자극시켜 일본과 영국 사이에 영·일동맹을 맺게 하였으며 일본은 미국, 영국의 후원을 받아 러시아의 만주철병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는 등 노골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했고, 일본은 1904년 2월 여순항을 기습 점령한 후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개시합니다. 러시아는 일본에 연전연패했으며 특히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는 일본 해군에 의해 대패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T.Roosevelt)의 중재로 같은 해 8월 미국 연안에 있는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강화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결과 조선은 러시아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 내지 목인 하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한 인천 사람들

조선 왕조 500년간 변방의 소요는 많았지만 외침에 의한 대란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기와 군대를 앞세운 약탈, 침략이었지만 병인양요부터 국권이 상실될 때까지 50여 년은 제국주의 세력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한 나라의 영토 위에서 전쟁을 벌이고 외교를 빙자해 침략의 발판을 다지는 것이 이전의 전란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양요, 왜요, 조약은 침략의 도구였고, 남의 나라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제국들 간의 야욕의 발로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나라와 민족에게 진정한 지도자가 있어야 하고 국민이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과거 50년 인천은 38선 서북쪽으로 막힌 버려진 도시였습니다. 남북전쟁의 상흔으로 북한은 적국이 되고,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대륙 중국은 죽의 장막이고, 또 미소 냉전의 주요당사국인 소련과 소통하기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인천은 한반도의 단전, 중심에 있으면서도 주어진 역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에 의해 중국은 죽의 장막을 거두고 세계와 적극적인 교류협력에 나서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소련도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펼치며 수구적인 냉전의 틀에서 벗어나 마침내 한 ․ 소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금강산이 열리고, 개성공단이 조성되는 등 냉전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한반도에 해빙기가 찾아옵니다.

여기에 세계 최고의 공항이라고 찬사를 받고 있는 인천국제공항의 개항과 경제자유구역이 인천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인천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통일은 어려워도 남북이 사람과 함께 물류의 소통이 활발해지고 개성공단이 확대되면서 여기에서 나오는 물품이 서울이 아니라 개풍군을 거쳐 강화 인천으로 직접 이어지고 진남포의 화물이 인천항으로 들어온다면 오랜 세월 닫혔던 황해가 다시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은 인천이 남북 평화 정착의 시발점이 되는 날이며 인천은 평화의 역동적 현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천 강화 출신인 죽산 조봉암 선생은 골육상잔(骨肉相殘)의 6.25전쟁이 남긴 상처를 차마 볼 수 없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평화통일을 주창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제 평화통일은 단순한 국내문제가 아니라 이미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끼리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통일이 제2의 민족독립이 될 것이란 뜻입니다.

만약 북한에 대한 외부의 압력이 심해지고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면 중국을 중심으로 기울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예측할 수 있을 만큼 너무나 명백한 현실입니다. 만약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남북한 통일문제가 우리 민족의 손을 떠나 국제문제로 비화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 상황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백범 선생이 중경에서 독립군을 훈련시켜 드디어 조선 진공작전을 펼치려 할 때 갑작스럽게 일본의 패망 소식이 들려오니 등 뒤에서 폭탄이 터져도 놀라지 않았던, 그 담대한 선생께서 땅에 털썩 주저앉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 우리는 어떻게 하지. 우리는 어떻게 하지”라며 한탄을 하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독립을 위해 무력투쟁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과연 발언권이 있겠는가?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이, 우리 민족의 해방이 우리 힘만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타의에 의한 조국의 분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남북문제와 평화통일에 있어 국제적인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정부와 우리 인천이 해야만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천의 발전과 평화적인 통일 분위기의 조성은 떼어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숙명적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화통일을 위한 국민운동과 함께 시민운동으로서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현재 우리 민족이 처해있는 당면과제인 분단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제2의 분단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후 한국 정계를 크게 움직인 인물 중에는 조봉암, 장면, 곽상훈 등 세 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조봉암은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면 도전해 한 번은 실패했으나 또 한 번은 투표에서는 이기고 개표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장면은 4.19 이후 내각 수반이 되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실각하고, 곽상훈은 국회의장이 됩니다. 이렇게 인천은 여당에 철저하게 대립한 야도(野都)였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지원받기는 어려웠습니다. 학계에서는 한국 고미술학의 태두 고유섭이 있고, 이화여자대학교 초대총장을 역임한 김활란도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신태환, 3․4대 대법원장(8년 동안)을 역임고 판결문을 한글로 쓰도록 지도한 조진만, 또 현대미술의 논단을 개척하신 이경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 장발과 유체공학 분야의 장극 같은 과학자도 있었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한 정치인 이승엽, 조각가 조규봉, 평론가 김동석, 극작가 함세덕, 소설가 현덕 등은 여기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군사정부가 집권한 이후 인천에서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중국이 활짝 문을 열고 소련이 냉전의 축에서 벗어나 남북이 전보다 유연하게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되면서 인천에는 인구도 늘고, 선거구도 늘어 국회의원 수가 12명이 되었습니다. 재선도, 3선도, 4선 의원도 생겨났지만 인천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없으며 중앙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은 더욱 없었습니다. 따라서 인천 시민들 가슴속에는 은연중에 인천에서도 조봉암이나 장면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 나오기를 갈구하는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습니다.

밝아오는 인천의 미래

앞으로 남북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물류가 활발해질수록 인천은 더욱 번성하고, 우리가 원하는 큰 인물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도 함께 만들어지리라 기대합니다. 여기에 좀더 덧붙여 말해보면 제가 35년 전 인천의 정체성과 인천 사람들의 응집력을 내걸며 새얼문화재단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인천에 관계되는 단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인천시에 200여 개의 단체들이 저마다 ‘인천’을 내세우고 환경 ․ 복지 ․ 경제 ․ 미술 ․ 음악 ․ 문화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중에는 내실이 있는 단체들도 있고, 이름만 걸어놓고 있는 모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인천을 앞에 내세워야 된다는 의식이 우리 시민사회단체에 일반화된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가 모두 동창회 활동을 내 일처럼 활발히 하고 있는 것도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하고, 격려할 만한 일입니다. 근래에는 부모의 고향은 다르지만 그 자제들이 모임을 갖고 인천을 위한 대화와 협력을 하고 있고, 조직 체계를 잡아 활발하게 움직이는 단체로 키워가고 있는 현상들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천의 정체성과 응집력을 통하여 인천의 인물을 성장시키는 데 생명력 있는 터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