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양신(良臣)의 조건, 지도자의 자질

  • 날짜
    2014-02-14 09: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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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신(良臣)의 조건, 지도자의 자질


중국 섬서성 시안(西安) 시내 어디에서나 보이는 것이 대안탑(大雁塔)이다. 이 탑은 당나라의 큰 스님 현장법사(玄裝法師, 602? ~ 664)가 주지로 있던 자은사(慈恩寺) 경내에 있는 전탑(塼塔)으로서 스님이 인도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불교경적(佛敎經籍)을 보관하고, 번역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절과 탑을 건립하는 데는 당 태종(李世民, 598~649, 재위 626~649?)의 아들인 고종(高宗, 649 ~ 683)의 어머니 장손왕후(長孫皇后, 601 ~ 636)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찰(願刹)로서 이에 소용되는 모든 경비와 인력은 당 조정에서 부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건립 당시에는 23만 제곱미터의 광대한 부지와 장엄한 국찰(國刹)로 유명했으나 당 말기의 전란으로 절은 소진되어 사라지고 탑만 남아 있었는데 이 근래 현장법사기념관과 함께 복원 작업이 새롭게 진행되며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36세에 서거한 장손왕후의 시호가 문덕황후(文德皇后)였다. ‘문덕’이라니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 같은 시호를 받았으며 광대하고 웅장한 국찰을 일으켜 극락왕생을 빌게 되었을까? 당 태종의 황후였기 때문에 또는 황제 고종의 어머니란 이유였을까? 다음의 일화들은 장손황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려 준다.

정관 8년인 634년, 황후의 병이 위독해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황후의 병이 심각한 것을 보고, 수복(修福)을 시행할 것을 건의했다. 수복이란 죄인을 사면하여 민심을 얻어 하늘에 고하면 병에서 벗어나 수명을 연장한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관례 중 하나였다. 그러자 황후는 인명은 재천인데, 나로 인하여 국법을 어지럽힐 수 있느냐고 거절했다.

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당 태종 이세민은 “훌륭한 참모를 잃었으니 애달프기 그지없구나. 장손황후는 언제나 옳은 말을 하여 짐의 모자란 곳을 메워주었는데 이제는 누가 직언으로 나를 채워줄 것인가”라면서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당 태종은 종종 국사와 관련해 황후에게 조언을 구하곤 했다. 황후는 황제가 물으면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황제가 재차 물으면 “그것은 황제의 일입니다. 일개 아녀자인 제가 어찌 정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그래도 물으면 그제야 못 이기는 척 의견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신중한 일인가. 장손황후는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황제가 묻는 바의 진의를 파악하고 나서 문제의 시비를 정확하게 개진하는 슬기를 발휘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경연(經筵)을 마친 태종이 내궁으로 돌아왔는데 얼굴에 성이 가득했다. 황후가 그 이유를 물으니 “위징(魏徵, 580~643)이 나를 지나치게 괴롭히고 있으니 기회를 봐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황후는 곧바로 물러나 큰 행사 때나 입는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황제 앞에 서서 밝은 낯으로 태종에게 경하를 올렸다. 태종이 영문을 몰라 까닭을 묻자 황후는 정중한 자세로 말했다.

“신첩이 역사책에서 본 바에 따르면 군주가 어질고 현명해야 그 신하들도 충성스럽다고 했습니다. 위징이 그처럼 거리낌 없이 직언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모두 폐하의 어질고 현명함을 증명하는 것이니 이렇게 출중한 지아비를 두었으니 마땅히 폐하께 감축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나라의 복이요, 백성의 복이니 이를 경하 드립니다.”

먼저 황제의 훌륭함을 내세우면서 위징을 보호하는 슬기, 정치가 예술이라고 하는데 어느 예술이 이리도 흐르는 물과 같으랴. 이처럼 훌륭한 황후가 직접 나서 보호해준 위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정관 6년, 경연장에서 모든 중신들이 황제 앞에서 ‘충신(忠臣)’을 강조하는 이론을 한참 펼치고 있는데, 위징은 “저는 충신 노릇은 하고 싶은 생각이 없고, 양신(良臣)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한 번 그 자리에 내가 있다고 상상해보니 분위기가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절로 날 지경이다. 높은 사람 앞에 서면 자기 소신보다는 윗사람 눈치 보기가 급급한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일상적인 상례인데, 하늘같은 황제 앞에서 감히 충신 되기를 거절하다니 자칫하면 목이 날아갈 판이다. 당연히 황제는 양신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위징은 담담하게 “충신이란 대개 자기가 모신 주군도 죽고, 나라도 망하고, 그리하여 온 백성이 불행해지고, 자신은 물론 온가족도 죽임을 당하고 얻는 것은 훗날 역사기록에 충신이라는 이름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신은 평소에 자기가 모신 주군에게 바른 소리를 꾸준히 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보탬이 되어 주군도 영광되고 나도 편하고, 내 가족도 잘 살고, 또한 백성도 어려움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양신의 역할입니다”라고 답했다.

경연장에 있던 중신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마음속 영상으로 재현해가면서 그 표정을 바라보면 통쾌하면서도 무거운 절망감을 함께 느낀다. 평소 꾸준하게 나라와 사회와 내 고장에 대해 쓴 소리하는 시민이 많을 때 그 사회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그 시대의 양신이요, 우리의 양심이 된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처참하게 실패하고 돌아오면서 ‘위징이 살았다면 이 원정을 막았을 텐데’라면서 통탄했다는 사실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기록되어 있다.

한 사람의 옳은 말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인 동시에 그 말이 또한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오늘 정부·국회·사법부·재벌 및 공기업을 비롯한 모든 기업에서 일하는 인재들 가운데 양신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양신이 있기 전에 이 같은 인재의 고언과 직언을 가슴에 새겨줄 지도자들은 얼마나 있을까? 양신이 있기 전에 지도자의 자질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이 글은 2014년 2월 12일자 <인천in>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