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동쪽 성문 밖 무덤을 기웃거리는 사람

  • 날짜
    2014-06-17 17: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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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는 공자(孔子)의 언행록이라 생활철학에서 배어 나오는 오묘한 깊이로 삶을 다시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맹자(孟子)』는 훌륭한 제자와 대화를 전개하면서 역사와 제도에 대해 치열하게 논박하며 자기 논리를 창조해 나간 책이다. 비록 사제지간이라지만 이 과정에서는 서로 한 치의 양보가 없다.

「만장장구상(萬章章句上)」에서 맹자의 수제자인 만장과의 대화를 간추려보면 “요(堯) 임금이 자기 자식이 아닌 순(舜)에게 천하를 주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습니까?” “아니다. 천자라 하더라도 천하를 남에게 줄 수 없고, 이것은 하늘이 준 것이다.” “그러면 하늘이 직접 주었다는 말입니까?” “아니다. 하늘은 말을 하지 않고 행동과 일로 보일 뿐이다.” “행동과 일로 보인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천자는 하늘에 사람을 추천할 수 있으나 하늘로 하여금 그에게 천하를 주게 할 수는 없다.” “하늘에 추천하니 하늘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백성에게 보이니 백성이 받아들였다는 말이 무슨 내용입니까?” “추천된 자가 제사를 주재하니 신들의 감응이 있었으므로 이것은 하늘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그 사람으로 일을 주관하게 하니 모든 것이 순조로워 백성이 편안하게 되니 이것 또한 백성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위의 글을 읽고 또 읽어도 하늘이 요와 순에게 천하를 준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백성들이 임금으로 인정했다는 내용도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자유로이 자기주장을 펼쳐나갈 수 있는 것이 춘추전국시대 오백여 년의 위대함이다. 이 시대에는 영웅호걸만 군사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학자와 이들을 따르는 무리도 학파를 이루어 서로의 이론을 겨루고,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학문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맹자는 이런 환경에서 다양한 사상과 겨루면서 요순선양(堯舜禪讓)의 강력한 도덕적 설화를 각인시키고, 자신이 추구했던 인의(仁義) 학설의 최종적 근거를 마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학자 중에 많은 사람들이 맹자와는 전연 반대되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예를 들어 순자(荀子, B.C. 298? ~ 238?)는 자기 저서 『순자』 「정론(正論)」편에서 “요순이 선양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것은 천박한 사람들이 퍼뜨리는 말이며 어리석은 사람들의 주장이다.”라고 하였다. 또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순이 요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고 요의 아들을 단주(丹朱)까지 유폐시켰다”고 되어 있다.

한비자(韓非子, B.C. 280? ~ BC 233)도 자기 저서에서 순이 요의 왕위를 찬탈한, 포악한 패륜아로 기술하고 있다. 왕위는 힘으로 보위되는 것이지 인이나 덕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국 역사 오천 년에 요·순을 제외하고는 선양의 기록은 없다. 문제는 그 옛날 2천5백여 년 전에 그것도 제왕의 체제하에서 서로 대립하는 주장이 공존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우리는 오늘날 민주사회에 살고 있다지만 이렇게 정반대의 논리를 개진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비교 성찰해볼 일이다.

물론 『맹자』에는 이처럼 근엄한 인의에 관한 이야기만 있는, 재미없는 고전이 아니다.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의 마지막 편에는 시대를 반영한 풍자가 있다. 제나라에 처와 첩을 한집에서 동거하는 사람이 있는데,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나가서 들어올 때는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돌아왔다. 처와 첩에게는 돈 많고 귀한 사람들과 동석했다고 자랑했다. 처는 남편과 함께 즐겼다는 사람 중에 한 사람도 집을 방문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며 하루는 남편의 뒤를 밟았다.

그러나 길가에서 남편을 보고 인사를 나누는 사람조차 한 명 없었다. 아내는 남편이 동쪽 성곽 무덤으로 가서 장례 지내고 남은 음식을 얻어먹고 모자라면 다른 곳에서 배를 채우는 것을 보고 집에 돌아와 첩에게 이 사실을 전하며 “남편을 우러러보며 평생을 함께 산 사람인데 지금 이 꼴이라니” 하고, 남편을 원망하며 대성통곡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이런 사실을 여전히 아내와 첩이 모르는 줄 알고 철면피하게도 그날도 귀한 사람들과 동석하여 즐겼다고 자랑했다.

맹자는 “진실한 군자의 눈으로 볼 때 이 세상 사람을 평가한다면 부귀와 이익과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치고 처첩이 통곡하지 않도록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면서 통탄했다. 요사이 ‘관(官)피아’니 ‘적폐(積幣)’니 하여 스스로 자학하고,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이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우리 모두 민심으로부터 얼마나 떳떳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지 스스로 깊이 뉘우쳐야 하지 않을까. 사회가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남들이 모를 거라고 전제하고 동쪽 성문 밖 무덤을 기웃거리는 사람이 나 자신이 아닌지 스스로 깊이 성찰해 볼 일이다.

* 이 글은 2014년 6월 11일자 인천일보와 인천in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