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무신론자와 대화하는 교황

  • 날짜
    2014-08-13 11:4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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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 공부한 바가 없습니다. 다만 이 근래 이탈리아의 유력지로 알려진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의 발행인이며 무신론자인 에우제니오 스칼파리(Eugenio Scalfari)와 교황 사이에 서신교환과 또 교황 자신이 친히 대담하자고 제의한 기록이 한 권의 책(『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으로 나와 있어 감명 깊게 읽은 소감을 간략히 전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 지방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란 분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교황파와 황제파로 분열되어 서로 다투고, 가톨릭교회 역시 교회 본연의 역할과 임무로부터 멀어져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교회 내부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 밖으로 나와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현장을 뛰어다녔습니다. 그는 엄동설한에 옷이 없어 고생하는 사람에게 한 벌밖에 없는 자기 웃옷을 벗어 입혀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악(惡)’이 있다고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였으며, 돌아가신 뒤 시신에는 예수님과 같은 성흔(聖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을 일러 두 번째로 나타난 예수라고도 합니다.

작년 교황에 선출된 프란치스코는 예수회에 속하면서도 ‘프란치스코’란 교황 명을 선택했습니다. 그 분은 266대 교황의 지위에 올랐는데, 이전까지 단 한 명도 프란치스코란 이름을 가진 교황이 없었다고 합니다. 스칼파리가 프란치스코란 이름으로 교황이 되는 분은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말하니 교황은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교황에 선출된 뒤로도 궁에서 살지 않고 게스트하우스 같은 산타 마르타에 머무르며 소박한 생활을 이어가며 평사제에게도 서슴없이 고해성사를 하는 교황의 매력에 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칼파리는 새로 선출된 교황에게 답변하기 어려운 여덟 가지 질문을 보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가 유대인에게 번영과 안녕을 약속했는데, 3000여 년이 다 되어가도록 실현되지 않았고 도리어 유대인들은 ‘쇼아(Shoah)’의 공포에 떨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하느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닌가? 무신론자가 교회에서 정한 죄를 지었다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또, 신자는 계시적인 진리를 믿는 반면에 무신론자들은 절대적인 것이란 없고 단지 일련의 상대적인 진실들만 있다고 믿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교황은 친절하고 상세하게 답변합니다. 한 번쯤 시간을 내어 읽어볼 만한 내용입니다. 교황이 신문기자에게 서신을 보낸 일은 로마교황청 역사상 없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겸손하면서도 시민과 현장으로 뛰어든 용감한 자기실현이라 하겠습니다. 교황의 답변 중 인상적이었던 몇몇 부분을 소개해보겠습니다.

● 절대적인 진리란 없습니다.
● 저는 어려운 사람, 고통 받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개종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돕기 위해서입니다. 개종시킨다는 의식은 진실로 허황된 것입니다.
● 교황청이란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교황청이 신하를 거느리는 궁정 같은 분위기가 교황제의 큰 병입니다.
● 예수님은 해방이요, 어렵고 천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위아래와 소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 규제가 없는 자본주의는 독재입니다.
● 나는 당신을 설복시키기 위해서 말한다는 태도야말로 최악의 종교적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 인간이 자연을 폭압적으로 착취함으로써 자멸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황은 브라질 여행 중에 인류도 시작과 끝이 있는 모든 존재처럼 언젠가 소멸할 것이라고 말했고, 교황청을 행정조직으로 두고 교황, 추기경, 대주교 등 모든 성직자는 교회에 안주하지 말고 빛을 가지고 어두운 곳으로 고통 받는 현장에서 그들과 손잡고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황이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교황의 방한이 하나의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번을 계기로 우리도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무신론자와도 만나주는 교황, 얼마나 멋진 평화이며 소통입니까?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실천 없는 학문은, 절실함이 없는 기도는 바람 앞에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리를 실천으로 보여주는 행동인이라 하겠습니다.

동양고전에도 이러한 내용의 글이 많이 보입니다. 2300여 년 전에 저술된 순자(荀子, BC298~BC238)의 「유효(儒效)」편에 “…… 성인이 하는 행위에는 별다른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실천하는 데 궁극적인 목표가 있을 뿐이다”라고. 진리와 실천을 몸소 행하는 사람에게는 동서양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 이 글은 2014년 8월 13일자 <인천일보>와 <인천in>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