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만리장성도 지킬 수 없는 나라

  • 날짜
    2015-01-14 15: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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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2월 31일 자정(子正), 전등사(傳燈寺) 범종각 앞마당에는 삼랑성 축제의 일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새해 소망을 풍선에 적어 하늘에 띄우며 타종 행사를 한다. 새로운 역사를 잉태한 밤을 밝히며 떠오르는 햇살과 더불어 새해 첫날의 소망에 대한 절절함이 깊어져 고즈넉한 산사(山寺)는 사람들 열기로 가득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쌓이는 소망이 많아진다. 정의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사회, 진영논리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사회, 국민 누구나가 통일을 고민하는 사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사회, 빈부격차가 적은 사회, 개성공단 만한 공단 하나가 더 만들어져 남북한 간의 인적·물적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기를 갈구하면서 이 희망 중 하나라도 현실이 되었으면 한다.
당(唐)나라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갈 무렵, 인도에서 당나라로 들어온 보리달마(菩提達磨)가 노자(老子)사상과 상통하여 성립한 것이 선종(禪宗)이다. 여기에는 동양사상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종지(宗旨)가 있다. 세상 모든 일에 뜻을 전하는 데 있어 글자, 말, 설교만으로는 부족하고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사람이 뜻을 얻으려면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깊숙이 울리는 감동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심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만 통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타인을 설복시키기 위해 설교한다는 태도야말로 최악의 종교적 태도”라고 지적하고, “교회의 성장은 개종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마음을 타인에게 열자. 마음을 닫는 순간 자기중심이 되며 고인 물처럼 썩는다”고 경고했다.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소통이 막힌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 가슴 깊이 찔리는 메시지가 아닐까!
오늘날 집단지성사회라고 할 수 있는 대학교에서 여전히 학문 연마를 주업으로 삼고 있는 교수들의 발언에는 권위가 있다. <교수신문>이 해마다 교수들에게 물어 그 해의 고사성어를 발표하는데, 지난 연말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가 선정되었다. 이 말은 잘 알려진 것처럼 사마천(司馬遷, BC 145 ? ~ BC 86 ?)이 저술한 『사기(史記)』의 「진이세본기(秦二世本紀)」에 나오는 글이다. 지록위마란 누구나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 옳다거나 아니라고 고집하여 주변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는 행동을 말한다. 또는 이 고사성어가 생긴 유래에 따라 윗사람을 농락하여 자신의 권세만을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나라가 힘을 잃으면서 시작된 500여년의 춘추전국시대는 전쟁으로 밤을 지새우지만 경제적으로는 우경(牛耕)과 철제 농기구의 사용, 관개(灌漑)사업으로 농업이 발전하고 상공업도 발전하여 대도시가 형성되고 청동화폐가 사용되었다. 이로서 전통적 사회조직이 무너지고 신분귀천과 관계없이 일반 평민도 자기 능력에 따라 출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사상적으로도 사회변화를 반영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부르는 사상가들이 자유를 누리면서 화려하게 출현했다. 그러나 분봉(分封)된 제후들은 자신의 권한과 영역을 더 많이 확대하기 위하여 온갖 슬기, 책략, 기발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데, 그 대단원을 장식한 사람이 바로 진시황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한 진시황(秦始皇)은 순행 중 사구(沙丘) 평대(平台)에서 갑자기 죽었다. 진시황이 급작스럽게 죽자 환관(宦官) 조고(趙高)와 승상 이사(李斯)는 현명하고 효성이 깊은 장자 부소(扶蘇)를 자결하도록 만들고, 우둔한 호해(胡亥)를 이세(二世) 황제로 세웠다. 조고는 항시 황제 옆에 있는 환관의 지위를 이용해 전횡을 일삼았는데, 승상 이사가 눈엣가시가 되자 그마저도 죄를 씌워 처형했다. 그뿐만 아니라 진시황과 함께 나라를 세우는 데 공로가 컸던 옛 신료들도 모두 처형했다.
황제를 꼭두각시 삼아 자신이 모든 권력을 휘두르게 되자 조고는 엉뚱하게도 이번엔 자신이 스스로 황제가 되고픈 야심을 품었다. 스스로 황제가 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세를 알아보기 위해 황제 앞에 사슴을 끌어다놓고, 말이라고 우기는 요설을 떠는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일을 벌였다. 조고의 위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누구도 사슴을 사슴이라 말하지 못했다. 그는 호해를 황제로 세운지 3년 만에 그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수순으로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세웠으나 도리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이미 진나라의 국운이 기울어 진의 3세 황제가 된 자영 또한 재위에 오른 지 90여일 만에 진 제국의 황실자제, 귀족들과 더불어 항우(項羽, BC 232~BC 202)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지루하고 혼란했던 천하를 통일하고 진시황이 세운 광대한 통일제국은 15년에 그치고 말았다. 진의 멸망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붕괴의 장송곡이 시작된 것은 사슴을 말이라 우기던 한낱 내시의 욕심 때문이었으니 진나라의 강성함과 광대함을 떠올려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록위마’가 고사성어로 손꼽히게 된 것은 한마디로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사회구조를 풍자한 것이며, 이러한 생각에 동조한 교수와 지식인들이 많다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이 크게 각성할 일이다. 긴 세월의 혼란을 뚫고 통일을 이룰 만큼 강성했던 진나라가 그처럼 허망하게 역사에서 사라진 원인을 성찰하면서 새해 을미년을 맞이해야 한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論語)』 「안연(顔淵)」 편에서 국가경영(政治)의 요체는 “경제(食)를 풍족히 하고 군사력(兵)을 든든히 하여 백성이 믿도록(信) 하는 것”이지만, 이 세 가지 중에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면 “먼저 군사력을 버리고, 다음 경제를 버려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백성이 신뢰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백성이 신뢰하지 않는 나라는 만리장성으로도 붕괴를 막아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