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애민(愛民)정신의 뿌리

  • 날짜
    2015-08-13 09: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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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성군(聖君)은 아니지만 당(唐)나라를 반석 위에 세우고 정치․문화․경제 및 모든 분야에서 찬란한 업적을 세운 태종 이세민(李世民, 재위 626~649)은 납간(納諫: 직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실천한 황제로 유명하다.
정관(貞觀) 6년, 위징(魏徵, 580~643)이 황제에게 절을 올리며 말했다.
“소신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며 언제나 바른 것을 행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결코 폐하를 속이거나 배반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아무쪼록 저를 양신(良臣)으로 만드시되 충신(忠臣)이 되기를 바라지는 마십시오.”
그러자 태종이 물었다.
“양신과 충신은 무엇이 다른가?”
위징이 대답하길,
“양신은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고 군주가 거룩한 천자가 될 수 있도록 도우며, 자손만대까지 복록을 누립니다. 하지만 충신은 자신은 물론 일가족 모두가 몰살당하고 군주는 폭군이 되며 국가도 가문도 모두 멸망하여 오로지 자신만 충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길 뿐입니다.”
태종은 끄덕이며 말했다.
“모쪼록 그 말을 꼭 지키도록 하라. 짐 역시 국가를 바르게 다스릴 계획을 잊지 않을 것이다.”
충신과 양신은 다 같이 나라를 위한 사람들이지만 결과는 전연 다르다. 충신은 나라가 험한 위기에 있거나 국가가 멸망하여 백성이 흩어지고 노예가 되거나 식민지가 될 때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은 군주가 백성의 뜻을 저버려 실패하고 처참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양신은 평소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으로 군주에게 직언하고 주위에 한쪽으로 쏠리는 사람이 적어야 가능하다. 쏠림 또는 편파(偏頗)적이라는 것은 백성을 반으로 쪼개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래서는 백성으로부터 힘을 얻어 유비무환(有備無患)이 가능할 수가 없다.
어느 날 이세민이 위징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 군주가 명군(明君)이며 어떤 군주가 암군(暗君)인가?”
이에 대한 위징의 대답은 평범하지만 참으로 하늘에 닿는 명언이다.
“겸허하게 들으면 총명해지지만 편협한 말만 들으면 우둔해지는 법입니다.”
이세민에게는 현무문(玄武門)에서 형 이건성(李建成), 동생 이원길(李元吉)을 살해하고 황제에 오른 험난한 과정이 있었으나 주위에는 능력 있고 현명한 참모들을 찾아내어 내 사람으로 만든 아량과 탁견이 있었다. 위징만 하더라도 형 건성의 참모였으나 포로가 되어 죽음을 앞둔 처지에서도 이세민에게 일갈하는 그 용기를 높이 보아 살려두었는데 후에 중국역사상 직간의 일인자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것처럼 당태종이 고구려 침략에서 크게 패배했을 때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분명 짐의 요동정벌을 막았을 텐데… 그랬다면 오늘 같은 비참한 참패는 없었을 것을” 하고 한탄했다는 기록이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있으니 이세민이 위징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 수 있다.
중국에 당 태종과 위징이 있었다면 우리 역사에서 앞으로 깊게 연구해야 할 인물로 정도전(鄭道傳, 1342~1397)과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이 있다. 훗날 성종 15년(1484년)에 편찬된 조선왕조의 정치․경제 등 모든 것의 골격이 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왕조 초기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과 『경제문감(經濟文鑑)』을 모체로 해서 이뤄진 것이다. 『조선경국전』에는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
“만일 임금이 천하만민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나라에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긴다.”
이것은 백성과 임금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백성이 임금을 따르거나 버리는 선택권이 백성에게 있다는 것을 선언하면서 민본사상을 강조한 것이다.
또 『경제문감』에서
“임금은 세습제이기 때문에 언제나 성인과 같은 임금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군주에게 권력을 몰아주지 않고 능력이 검증된 재상(宰相)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관직은 혈연, 지연, 학연을 따지지 말고 오직 시험제도를 통해서 선발해야 한다.”
“백성은 먹는 것이 하늘이므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주는 토지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철저한 민본사상을 기초로 앞서가는 정치제도를 일관되게 주장하다 굴절된 정도전의 생애에 대해서 저절로 숙연해지는 마음 금할 수 없다.
세종대왕이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성군임은 다 아는 일이다. 석학 한영우(韓永愚)는 세종의 애민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세종은 노비(奴婢)도 하늘이 낸 천민(天民)으로 생각하여 관청에 소속된 관비(官婢)의 출산휴가를 15일에서 산전 30일, 산후 100일로 늘려주고 관비의 남편 관노에게도 산후 한 달의 휴가를 주었다. 또 민생(民生)과 관련된 토지세(土地稅)를 합리적으로 개선한 시안(試案)을 놓고 약 18만 명에 달하는 전국 유지들의 찬부를 물어 결정했다. 이 시안에 대해 조정 신료들은 반대의견이 우세했으나 세종은 민의를 더 존중하여 결정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세계 어느 나라 황제보다, 또 그들의 참모보다 나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왕과 인물이 많았는데도 그들 중에는 꽃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한 뼈아픈 일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경륜과 이 땅의 토속에서 발생한 생각들을 오늘의 학문과 접목하여 더 큰 실용주의로 발전시킬 의무가 있는 것이다. 역사, 사람, 생활풍습, 말이 다른 외국의 이론이나 실례(實例)는 참고할 가치는 충분하지만 이에 매몰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선현의 지혜와 민생의 현장에서 찾아낸 답들은 단지 우리나라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될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 것에 대한 맹목적인 자부심도 경계해야 하지만, 우리 것의 가치도 모르는 채 남의 것만 배워서는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다.

* 이 글은 2015년 8월 12일자 인천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