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더위 속으로, 추위 속으로

  • 날짜
    2015-11-13 09:24:29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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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金之財 不見人 徒見金(취금지재 불견인 도견금)
금에 눈독이 들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직 금만 보인다.

“우공이산(愚公移山), 뜻을 세우고 끊임없이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돕는다”, “조삼모사(朝三暮四), 잔꾀로 남을 속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 자기를 알아주는 참다운 벗을 잃는 심정”, “기인우천(杞人憂天),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걱정” 위의 글들은 열자(列子, BC500~400?)가 저술한 『충허경(沖虛經)』에 나오는 사자성어 중 일부이다. 장자, 열자, 안자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사람을 웃기고, 울리고 때로는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되돌아보게 하고, 절절하게 성찰하게 만든다.

『열자』 끝맺는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부자가 되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금은방 옆을 지나다가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도 금을 훔쳐서 달아나다가 붙잡혔다. 관리가 혀를 차며 “아니 대낮에 그것도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데서 도둑질을 하다니 당신 정신 나간 거 아냐?” 그러자 도둑이 천연스럽게 “내 눈에는 오직 금만 보였지.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여러 분야 지도자들의 편향적이면서도 편협하기까지 한 현실에도 잘 어울리는 질타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이제는 앞으로 달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좌우를 살피면서 천천히 함께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도대체 정신없이 달리기만 한다면 어디까지 간단 말인가. 그 끝자락이 어디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이 되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힘겹게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어서, 4만 불이 되고, 계속 상승하여 5만 불이 된다면 우리 소시민의 삶의 질이 높아지고 어떤 생활을 하게 되는지, 또 어떤 꿈을 성취할 수 있는지 설계만이라도 보여줘야 할 것 아닌가! 국민소득이 증가하는데 반하여 실업률은 점점 높아가고, 세계에서 노인자살률이 선진국의 몇 배나 앞선다면 이것을 세계적 추세라고만 변명할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계속해서 세계 1위라고 발표되는데 하루에 40여 명 정도가 스스로 천명(天命)을 끊는다는 소리조차 이제는 무심해진지 오래되었다.

하루에 40여 명이면 한 달에 천2백여 명, 1년에 만4천여 명이 스스로 저승을 선택하는데 침묵을 지키면서도 금년 5월에 발생했던 메르스 전염병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초긴장을 다해 의료와 행정력을 총동원했다. 전염병은 무한대로 확대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겠지만 우리 주위의 자살하는 사람은 늘 계속해서 일상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 한다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일까!

금년 10월 3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2007~2011) 동안 우리나라에서 7만1천 9백여 명이 자살했다. 이것은 최근 중동에서 발생한 전쟁사망자 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이 비참하게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전 세계에서 발생한 주요 전쟁 사망자(민간인+연합군) 수보다 몇 배나 많은 수다. 이라크 전쟁 사망자 3만 8,625명의 두 배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사망자 1만 4,719명과 비교하면 거의 다섯 배에 이른다.

파괴와 살인을 정당화하는 전쟁보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서민생활을 반영하는 가계부채가 나날이 늘어 9월말 현재 1,321조 4,000억 원을 넘어섰다. 동국대학교 경제학과의 김낙년 교수가 금년 10월 29일 발표한 학술조사보고에 의하면 지난 2010~2013년 동안 상위 1%가 보유한 자산 비중은 전체의 25.9%이고, 상위 10%의 자산 비중은 66%로 전체 자산의 절반이 넘은 반면에 하위 50%의 자산비중은 2%에 그쳤다. 그리고 국가별 상위 10%의 자산 비중은 빈부격차가 극심하다는 미국이 76.3%, 영국이 70.5%, 그 다음이 한국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렇게 빈부의 차이가 심해질수록 사회불안과 질서가 어긋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면서도 속수무책이다. 착한 소시민들은 하루하루를 있는 힘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생활은 어렵고 일자리는 점점 더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 기술철학의 대가이자 프랑스 퐁피두센터 혁신연구소장인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 1952~ )는 사회가 이런 식으로 간다면 20년이 지나면 일자리가 지금보다 50%가 준다고 예측한다.

착한 내가 사는 사회인데,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째서 행복하지 않고 더욱더 암울해져만 가고 미래가 밝지 않을까! 사랑을 잃어버린 사회, 사람이 중심이 아닌 사회구조가 원인이지만 여기에는 착한 사람이 살아가기 힘든 정치·경제구조가 원인이라면 이를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또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1945년 이후 70여년을 빈틈없이 우리는 함께 사는 공동체 의식을 잃고 좌우 돌보지 않고 나만을 위하여 앞으로 달려온 생활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깊이 반성할 일이다.

『벽암록(碧巖錄)』은 선불교(禪佛敎)에서 『종용록(從容錄)』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공안집(公案集)인데 제43칙에 동산(洞山, 807~869) 큰 스님의 말씀이 있다. 더운 날 제자가 동산 큰스님께 “몹시 덥거나 추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리의 세계에 대해 묻고 있지만 거창한 물음이 아닌 지극히 일상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동산 큰스님이 대답한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는가.”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묻는다. “어느 곳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큰스님의 추상같은 대답이 번개처럼 빛난다. “추울 때는 그대 자신이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 자신이 더위가 되라. 이것이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이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던 시절 더위를 피하려면 내가 개천이나 계곡에 가서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면 되고, 추위를 피하려면 옷을 껴입고 불을 때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태를 해결하는 본질적인 방법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동산 큰스님은 더위나 추위를 피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더위가 되고, 추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더위도, 추위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착한 시민이 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나만 착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추위 속으로, 더위 속으로 그리고 현장에서 답을 찾아 극복해야만 한다. 모든 것은 나라의 주인인 시민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 이 칼럼은 <인천일보> 2015년 11월 11일 수요일자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