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왜 『사기(史記)』인가? - 2

  • 날짜
    2016-02-16 10: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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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보다 180년 정도 뒤에 태어난 반고(班固, 32~92)는 사마천의 『사기』와 쌍벽이라고 일컬어지는 『한서(漢書)』를 저술했다. 『한서』는 한나라의 건국으로부터 왕망(王莽, BC45~AD23) 정권 멸망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하면 전한(前漢) 약 220여년의 역사를 20년의 작업 끝에 완성한 대작이다. 사마천이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유업을 이어받아 『사기』를 완성한 것처럼 반고도 아버지 반표(班彪, 3~54)의 저술을 계승하여 찬술했다. 초기에는 모함을 받아 구속되고 문초까지 받는데 동생 반초(班超, 33~102)가 궁궐에 상소를 올려 경위를 해명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오히려 출세에 발판이 되고 『한서』를 저술하는데 황제로부터 보증을 받는다. 그러나 반고와 인연이 깊은 두헌(竇憲, ?~92)이 대역죄를 저지른 것으로 추궁받아 자살하고 반고도 그 측근이라는 이유로 투옥되고 60세 나이로 옥중에서 죽는다.

반고는 일찍이 『한서』「사마천전」에서 “아! 사마천은 그렇게 박학다식하면서도 스스로 온전할 줄 몰랐구나. 극형에 처해지고 옥에 갇힌 뒤에야 발분저서(發憤著書)했다고 임안(任安)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 말은 모두 그의 진심이었다. 그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한 까닭을 더듬어보니…… 시경에 ‘밝고도 지혜로워야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다(明哲保身)’고 했으니 진정 어려운 일이구나.”라고 동정하면서도 명철보신하지 못했던 사마천을 비판했다. 과연 반고 자신은 명철보신했던 것일까? 죽음이라는 사실만 본다면 오히려 천수를 누린 사마천이 도리어 더 나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역사가의 운명은 누구에게나 가혹한 것이었으리라. 『한서』의 일부는 반고의 여동생 반소(班昭, 49?~120?)가 저술하여 완성하니 아버지 반표, 아들 반고, 여동생 반소 삼인의 공동합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서』는 거의 반고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에 빛나는 고전은 이렇게 고난을 지나면서 성립되는 것인가 보다.

중국 역사의 맥을 이어온 정사는 2십4사(二十四史)인데 이 모두가 기전체(紀傳體)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삼국사기』도 신라본기(12기), 고구려본기(10기), 백제본기(6기), 열전(10기), 잡지(雜志, 9기), 연표(상중하)로 되어 있으니 이것은 사마천의 『사기』의 기전체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는 황제 아래 제후와 왕의 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세가(世家)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기전체라는 형식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시작된다. 세계의 중심인 황제의 이야기를 본기로 하고 그 주변에서 그 사람이 아니면 해낼 수 없었던 인물들 개인의 이야기를 열전으로 기술하므로써 천하의 전체상을 표현하려는 방법이었다. 기전체와 대칭되는 역사 서술형식이 연대순으로 기술하는 편년체(編年體)인데 공자가 감수했다는 『춘추(春秋)』, 그리고 송대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이 대표적인 편년체 역사서이다. 기전체의 황제 이야기인 본기에는 황제의 순위가 절대적이어서 편년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중국의 사대사서(四大史書)는 『사기』,『한서』,『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인데 『사기』는 통사(通史)이지만 『한서』,『후한서』,『삼국지』는 단대사(斷代史)이며 우리나라 『삼국사기(三國史記)』도 단대사에 속한다. 통사인 『사기』는 BC2333년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이념으로 건국한 고조선 단군(檀君)과 같은 위치에 있는 황제(黃帝)로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살았던 한(漢)나라 무제(武帝)까지 3천년의 역사이다. 그러나 『한서』는 초대황제인 고조 유방으로부터 마지막 황제 평제(平帝)까지인 2백년의 기록이고 『후한서』는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에서 시작해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 187~226)에게 황위를 선양한 헌제(獻帝, 189~220)까지 약 2백년의 기록이다. 『삼국지』 또한 위(魏)·촉한(蜀漢)·오(吳)나라를 세운 조조(曹操)·유비(劉備)·손권(孫權)과 후손에 대한 짧은 기간의 역사이다.

단대사에는 각 왕조의 황제가 중심에 있을 뿐이며 그 외에 세력은 이론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세가(世家)」는 기록되지 않는다. 따라서 유방에 앞서 황위에 오른 적도 없는 항우를 『사기』「본기」에 기록하는 것은 한나라를 적통으로 생각한 반고에게는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반고는 “한나라는 고대 성천자(聖天子)인 요(堯)황제의 덕을 이어받아 제업(帝業)을 세웠다. 6대 무제 때에 사신(史臣) 사마천이 과거 사람들의 공덕을 서술하고 사사로이 「본기」를 찬술했다. 이렇게 해서 한나라 「본기」에 역대 제왕들의 끝에 놓여 진시황제나 항우 등과 함께 섞이게 되었다”고 서전(敍傳)에서 토로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항우는 『한서』에는 본기가 아닌 열전에 있으며 유방과 항우 이전에 진나라에 최초로 반기를 들었던 노비출신 진승 또한 「세가」가 아니라 「열전」에 기록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사마천과 반고의 근본적인 차이의 단초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한서』는 당대에는 정사(正史)가 아니었다. 『사기』나 『한서』가 정사로 인정받은 것은 저자들 생전의 일이 아니라 한참 뒤 당(唐)나라 때에 와서 가능했다. 도대체 정사란 무엇인가? 정사에 상대되는 개념이 야사(野史)다. 권위나 권력에 의해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 야사인데, 정사는 정통(正統)을 내세워 세력과 정치적 분위기가 다분히 가미되어 성립하기 마련이다. 이런 배경에서 역사가 서술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정사라고 해서 바르고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것도 아니고 야사라고 해서 이단이며 왜곡된 저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사가 정치적 권위를 인정받는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정사에는 전(前)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함으로써 현 왕조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의미가 있다. 이를테면 원(元)나라를 넘어뜨리고 왕조를 세운 명(明)나라는 『원사(元史)』를 편찬했고, 명 왕조의 뒤를 이은 청(淸) 왕조는 『명사(明史)』를 출판했다. 이것은 명나라가 원나라를 계승한 정통왕조이며 또 청 왕조가 명나라를 계승한 정통왕조임을 주장하고 보증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고려 왕조가 김부식(金富軾, 1075~1154)을 책임 편찬관으로 하고 최산보(崔山甫), 이온문(李溫文) 등이 집필하여 만들어 낸 『삼국사기』도 묘청의 난 이후 삼국통일의 신라를 이어받은 고려의 정통성을 강조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도모하고 고려왕실의 왕권을 회복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일찍이 배운 바 있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그 내용을 익히 알고 있는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진수의 『삼국지』를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소설이다. 여기서 유비(劉備, 161~223)는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이고, 조조는 모든 악의 상징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유비가 한나라 왕실의 후예이므로 정통성을 인정하고 소설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와 상대적으로 진수(陳壽, 233~297)는 사마천, 반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저명한 사학자이며 『삼국지』를 저술하여 명성이 대단하다. 그러나 진수는 유비가 아니라 조조의 아들 조비의 정통성을 인정한다. 이유는 조조는 살아서 황제가 되지 않았지만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에게 선양을 받았다고 선포하고 위나라 황제가 된다. 위나라의 건국이다. 이에 질세라 촉한의 유비도, 오나라의 손권도 황제가 된다. 조비는 촉한, 오나라를 차례로 멸하고 자신의 아버지 조조를 위나라의 태조 무제(武帝)로 추존한다.

조조, 유비, 손권 모두 황제인데 실권은 황제 이상이지만, 황제의 칭호가 없던 조조만이 본기에 들어가고 황제인 유비, 손권은 황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진수의 『삼국지』가 쓰인 것은 진(晋)나라 때이다. 진수는 진나라 사람으로 진을 섬기는 입장에서 『삼국지』를 저술했다. 진은 본래 위나라의 장군이던 사마씨(司馬氏)가 위나라 황제에게 선양받아 세운 왕조다. 따라서 한에서 위로 그리고 위에서 진으로 정통 왕조가 이어진다고 하지 않으면 진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나라 진수의 『삼국지』에서 위나라 조조, 조비만이 본기에 들어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보면 촉한의 유비와 오나라의 손권이 정통성이 된 역사서가 나온다고 해서 이상한 일도 아니다.

동진(東晋) 시대에 습착치(習鑿齒, ?~384)가 지은 『한진춘추(漢晉春秋)』처럼 위나라가 아니라 촉한을 정통으로 하는 역사서도 있다. 유비는 한나라 황실의 후예로 되어 있다. 이 점을 중시한다면 촉한을 정통 왕조로 생각하는 근거는 충분하다. 뒷날 송(宋)나라 주자(朱子, 1130~1200)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촉한의 유비를 정통으로 삼았으며 이로 인해 촉한이 정통이라는 견해가 확립된다. 중국 역사에서 『사기』, 『한서』, 범엽(范曄, 398~446)의 『후한서(後漢書)』 그리고 『삼국지』를 정사의 사서(四書)라고 해서 모든 역사서의 기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위에서 밝힌 것처럼 정사도 견해에 따라 얼마든지 내용이 달리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정사라는 것은 반드시 옳고 정통성이 있고 역사적 사실에 부합된다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역사는 어떻게 얼마나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힘이 있느냐가 좌우한다. 근래 위안부 문제만 하더라도 한국이 일본과 미국에 밀리는 듯 하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힘찬 지구전을 펼쳐나가면서 연구와 함께 긍지로 승화시킨다면 밝은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2016년 1월 27일 수요일자 <인천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