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왜 『사기(史記)』인가? ⑦ - 어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 날짜
    2016-06-08 11: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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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는 왕조를 세운 인물의 내력을 다룬 「본기(本紀)」와, 봉건제후의 집안 혈통과 업적을 기록한 「세가(世家)」가 있다. 그런데 제후도 왕족도 아닌 천민 출신으로 진승(陳勝)이 세가 삼십 편 속에 기록된 것은 의아한 일이다. 철옹성 같은 진(秦)나라의 제도와 무력을 깨고 “어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王侯將相寧有種乎)”라고 외친 진승, 육국(六國)을 통일한 진나라에 맞서 시류를 타고 고독하지만 최초로 천하를 밝게 일깨운 반항아 진승을 세가에 올린 사마천의 높은 뜻이 하늘을 찌를 만하다. 이와 반대로 제후가 아닌 진승을 세가에 기록한 것은 잘못이라고 평하는 학자들도 있다. 반고(班固, 32~92)는 그의 저서 『한서(漢書)』에서 「항우본기」와 「진승세가」를 하나로 묶어 「진승항적전(陳勝項籍傳)」을 지어 항우와 진승을 폄하하였다. 이렇게 후세 학자들 중에는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사마천은 왜 천민 출신의 진승을 높이 평가했을까?

사마천은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황제가 나라를 잘못 이끌면 민초들은 민심과 함께 천지를 개벽할 수 있는 힘과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고자 했을 것이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한다. 제(齊)나라는 대륙 동쪽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금의 산둥반도에 있던 나라다. 소금과 철 그리고 해산물은 물론 땅이 넓어 물산이 풍부하여 사람들이 모여들고 수도인 임치(臨淄) 서문 밖 직산(稷山) 아래에는 직하학궁(稷下學宮)을 만들어 학자들을 불러 모아 대부(大夫)의 명예를 주고 녹봉을 지급하여 생활을 안정시키고 연구에 몰두하게 하니 문화가 널리 퍼졌다. 우리가 잘 아는 맹자(孟子, BC372~BC289)와 순자(荀子, BC313~BC238) 등이 이곳 출신이다. 춘추시대 말기부터 시작하여 제나라 직하학궁에서 꽃피운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세계사적으로 동시대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여러 학파의 형성과 비교된다.

강력한 진나라에 대처하기 위해 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 육국이 힘을 합하여 싸우자는 합종책(合從策)을 내세워 유세하면서 제나라를 설명한 소진(蘇秦, ?~BC284)의 이야기(『사기열전』 「소진편」 참조)를 들어보면 제나라의 국력과 수도 임치는 당시 어느 나라, 어느 도시와도 비교될 바가 아니다. 소진의 말에 의하면 먼 곳의 현이나 읍의 장정을 접어두고도 임치에서만 21만여 명의 병사를 징집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임치의 인구가 70여만 명이라는 설을 뒷받침한다. 이로부터 9백여 년 뒤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 인구가 통칭 100만 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동시대 유럽의 런던과 파리의 인구가 각기 10만 명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제나라 임치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웅장한 도시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단지 규모만 컸던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매우 수준 높은 도시였다. 공자가 제나라 수도 임치에서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심취해서 삼 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잃었을 정도로 문화적 분위기가 충만한 학문의 도시, 경제의 도시, 교양의 도시, 음악의 도시, 총칭하여 문화의 도시임에 분명하다. 이런 제나라가 모든 면에서 뒤진 진나라에 의해 어찌하여 병합 당하게 되었을까?

대평원에 위치했으나 뒤로는 사막과 산에 의지하고 있는 진(秦)나라는 오늘날 감숙성(甘肅省)에 터를 잡고 시작한 나라다. 후일 효공(孝公) 때에 나라가 융성해서 수도를 오늘의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으로 옮겼으나 제나라 임치에 비할 수 없는 초라한 도시였다. 지리적으로 서북쪽에 치우쳤을 뿐만 아니라 물산이 부족하여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에 가장 뒤처졌던 나라였으며 부강하지도 않았고 문명과 문화 역시 제일 뒤진 나라였다. 모든 면에서 뒤진 진나라는 첫째, 외부로부터 인재를 모셔오는 데 열중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진나라에 재상이라는 벼슬이 생긴 이래 25명의 재상이 있었는데 이 중 타국 출신이 17명이고 평민 출신도 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들 재상 중에 특출한 사람은 귀족으로는 상앙(商鞅, BC390~BC338)이고 평민으로는 목공(穆公)이 발굴한 백리해(百里奚)라고 할 수 있다.

상앙은 위나라 군주의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고향을 떠나 멀리 진나라에서 재상이 된 것이다. 상앙은 위대한 실용주의자, 봉건주의자, 이성주의자였다. 그에게는 어떻게 하면 진나라를 강대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문제가 늘 가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효공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개혁을 실천한다고 해도 객경(客卿)에 불과한 상앙으로서는 흩어진 민심을 한손에 틀어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 상앙은 시장이 서는 도성 남문에 큰 나무를 세우고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놓는 자에게 10금(金)을 주겠다”고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다시 “이 나무를 옮기는 자에게 50금을 주겠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옮겼다. 상앙은 그에게 곧바로 50금을 주었다. 이로써 나라가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 새롭게 엄격한 법령을 공포했다.

진나라의 부흥은 혹독한 형벌과 법률에 기댄 것인데 이것은 상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천리에 진동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개혁에 반대한 사람들이 받는 가장 가벼운 처벌이 얼굴에 묵형(墨刑)을 당하거나 코를 베는 정도였다. 그가 시행한 법률 중에 가장 악독한 것은 연좌제(連坐制)였다. 이는 가벼운 죄에 무거운 형벌을 내리는 전형적인 경죄중형법(輕罪重刑法)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다섯 집을 오(伍)라 하고, 열 집을 십(什)이라는 단위로 편성해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게 함으로써 연대책임을 묻도록 했다.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을 고발하면 적의 목을 벤 것처럼 포상을 받았으며 고발하지 않은 사람은 요참형에 처했다. 어느 집에 범죄인이 숨어있을 경우 ‘오’와 ‘십’으로 편성된 집들도 함께 같은 죄로 다스렸다. 얼마나 혹독한 연좌제인가!

만약 관청에서 발급한 증명서가 없는 사람을 여인숙에서 묵게 하면 그 주인 역시 동일한 죄로 처벌되었다. 당시에는 호적제를 시행하며 농민은 외지로 나갈 수 없었고 장사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장사를 하다 들키면 아내와 딸은 관노가 되어야 했다. 이렇게 혹독한 법률로 백성을 다스리니 죄인이 늘어나 어떤 날은 하루에 700여 명이 사형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또한 관리를 스승으로 삼고 경서를 불태울 것을 백성들에게 요구했다.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도록 부추겼으며 법령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은 불법을 저지른 범죄자로 처리하며 변방으로 추방했다. 후에 이사(李斯, ?~BC208)가 추진한 모든 정책은 사실상 상앙을 따라한 것에 불과하다. 잔혹하고 융통성 없는 이런 법률과 제도로 통치하는데 짧은 시간 내에는 효과가 매우 컸을 것이다. 나라가 부강해지고 군사력이 향상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기준에서는 백성들의 처참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으리라. 맹자가 말한 “백성은 사직과 왕보다도 중하다”는 철학이 없었던 것이 진나라 최대의 비극이다. 만약 진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늘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보자! 진시황의 병마용에는 제작자의 이름이 있다. 이것은 작가의 명예가 아니라 기간 내에 정품을 만들었다는 증거다. 축성(築城)할 때는 큰 돌 위에 어느 지역 누가 일꾼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이름이 음각되어있다. 이 또한 제때에 맞추어 성을 쌓았다는 증거다. 기한 내에 만들지 못했다면 그 백성들은 이유 없이 죽어야만 했다. 만리장성에는 만 명의 생명이 묻혀 만리장성이 되었다는 전설은 거짓이 아닐 수 있다. 장성을 쌓다 죽은 남편의 혼을 찾아 헤매는 맹강녀(孟姜女)의 슬픈 전설이 왜 기록에 있을까! 오늘날 중국의 관광지로 손꼽히는 장성과 병마용을 볼 때 백성의 눈물과 죽음이 묻혔다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서 관광객은 카메라 셔터를 눌렀으면 한다. 이렇게 포악한 진나라에 모든 것을 갖춘 제나라가 망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지도자의 미래지향적인 의지와 백성에 대한 현장 인식이 부족한데다가 위로부터 아래까지 부패했기 때문이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지만, 제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면 중국의 역사와 사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진승이 고생할 때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 고독했으리라. 홀로 “아!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리오(嗟乎 燕雀安知鴻鵠之志哉)”라고 마음을 달랜 것을 보면 품은 뜻이 큰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맹자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늘 숙지했다고 생각한다. 진승은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워 6개월간 황제 자리를 지키다 힘이 부족해 죽은 사람이다. 진승이 무섭고 강력한 진나라에 반기를 높이 들었을 때, 항우도, 유방도 감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진승과 함께 혁명을 시도한 사람들이 훗날 항우, 유방과 함께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유방이 제위에 오른 뒤에 후손도 없이 죽은 진승을 위해 항시 때가 되면 제사를 지내도록 조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5년간 항우와 싸워 승리한 유방이 뒤를 돌아보았으리라. 그 역시 천하를 수많은 병사와 백성의 피로 적시고 나서 얻은 제국의 영광이 진승으로부터 시작되는 길고도 멀었던 험난한 여정이었음을 결코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은 2016년 6월 8일자 <인천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