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일광천하(一匡天下), 민심을 얻어 천하를 구한다

  • 날짜
    2016-10-21 10:17:41
  • 조회수
    981

새얼문화재단 중국역사기행단(9.21~9.27)은 십오륙 년 전에 답사했던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수도 임치(臨淄)를 찾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관중을 비롯해 안영, 강태공의 묘역은 잡초로 뒤덮여 초라했다. 그러나 오늘 다시 찾은 그곳은 사당과 동상, 광장 그리고 묘역을 장대하게 치장했다. 아마도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과 그 과정에서 위민(爲民)사상을 일군 위대한 재상들을 추모하는 것도 있겠지만, 서둘러 볼거리 관광지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작업 속에는 중국 주석 시진핑(習進平)의 ‘중국의 꿈[中國夢]’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태공의 묘역 폐문에는 ‘주사제조(周師齊祖)’라는 전자(篆字)체 글이 새겨져 있다. 주나라의 스승이요, 제나라의 조상이라는 강태공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제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어울리는 말이다. 그런데 묘역 뒤쪽에는 강태공 후손들의 비석들이 크게 들어서 있다. 그중 눈에 띄는 비석이 지난 2016년 9월 12일에 세워진 노씨선조지비(盧氏先祖之碑)이다. 이 비를 조성한 사람은 노태우(盧泰愚) 총통(總統)이라고 되어 있다. 노씨가 강씨와 뿌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중국의 논리인데 우리 일행은 한동안 그 비석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의 일이다.

예전에 안영의 묘를 찾을 때는,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물어물어 찾아가니 밀밭 저 가운데 길도 없는 곳에 초라하게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 다시 가보니 웅장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동상, 사당, 광장 그리고 그 주위가 묘역으로 정화되었다. 안영은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 3인의 제후를 50년간 모시면서 옷 한 벌로 30년 동안 지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검소했으며 제갈공명도 존경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은 “오늘날 안자가 살아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드는 마부가 되어도 좋을 만큼 흠모한다”고 했다.

『설원(說苑)』 「군도(君道)」편에 이런 글이 있다.

안영이 모시던 경공과 대부들이 함께 교외에서 주연을 베풀어 흥이 돋을 때 경공이 활을 쏘아 멋지게 과녁을 맞히자 단상의 모든 신하가 명궁이라고 소리쳤다. 소리는 마치 한 입에서 나온 듯 똑같았다. 이때 경공은 얼굴빛을 바꾸며 크게 탄식하면서 들고 있던 궁시(弓矢)를 내던져 버렸다. 재상인 현장(弦章)이 이를 보고 경공 앞으로 다가왔다. 경공이 말하길 “현장, 내 안영을 잃은 지 17년이 되도록 아직 나의 과실이나 옳지 못한 정책에 대해 쓴소리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지금 내가 활을 쏘아 과녁을 맞혔다고 해서 모두 칭찬하는 말이 어찌 한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저리도 같은가?” 그러자 현장이 대답했다. “이는 여러 신하들이 불초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는 임금의 잘못을 알기에 부족하고 용기는 임금의 안색을 범하기에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있습니다. 제가 들으니 임금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신하는 그를 따르고 임금이 즐기는 음식이 있으면 신하도 따라서 먹습니다. 예를 들면 자벌레[尺蠖]란 놈은 누런 잎을 먹으면 누렇게 되고 파란 잎을 먹으면 몸이 파랗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주위 사람들이 비위 맞추는 것을 좋아하시면 여러 신하가 자연스럽게 아부할 뿐 간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경공은 “오늘 한 말은 그대가 임금이고 내가 신하 같구나” 하면서 크게 감격했다.

지도자는 어려운 백성들의 환경과 민심의 분위기를 먼저 파악하고 이것을 돌파할 수 있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잘 가려 등용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그리고 되도록 일을 직접 처리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지도자가 직접 챙기면 주위의 참모와 장관들은 일을 자주적이고 창의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도, 기회도 모두 잃어 무능하다는 말을 주위로부터 듣기 때문이다.

관중(管仲, BC?~BC645) 묘역을 찾아 사당 입구로 들어서자 문 위에 ‘일광천하(一匡天下)’라는 글이 멋지게 걸려 있었다. 『논어(論語)』 「헌문」 18편에 나오는 글이다. 자공이 관중을 비판하니 공자가 관중은 민심을 얻어 천하를 통일하여 질서를 세웠다고 칭찬하는 내용이다.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폭정을 뒤엎고 은(殷, BC1600~BC1046)나라를 창업한 탕왕(湯王)이라는 성군이 있었다. 혹독한 가뭄이 들어 나라가 힘들자 탕왕은 단을 쌓고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정치하는 것이 바르지 않습니까?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습니까? 어찌하여 이토록 심하게 비를 내리지 않으십니까? 궁전이 너무 화려합니까? 부인들이 정치에 많이 참견합니까? 어찌하여 이토록 심하게 비를 내리지 않으십니까? 뇌물이 행해지고 있습니까? 남을 모함하는 자들이 많습니까? 어찌하여 이토록 심하게 비를 내리지 않으십니까?” 『순자(荀子, BC313~BC238)』, 「대략(大略)」에 나온 글이다. 이 얼마나 간절한 기도이며 지도자의 자기성찰인가!

이렇게 많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자신(改過自新)하겠으니 백성을 위해서 비를 내려달라는 기우(祈雨)였다. 우리가 만나는 정치인들도 이렇게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과 백성을 섬기면 기나긴 한재(旱災)에도 단비가 내리는 것은 하늘과 백성의 뜻이 된다.

 

* 이 글은 인천일보 2016년 10월 12일자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