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사직지신(社稷之臣)이 없는 나라

  • 날짜
    2016-11-11 09: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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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제(漢武帝 BC156~BC87)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할아버지 문제(文帝)와 아버지 경제(景帝)의 양 대에 걸친 40년 치세(治世)로 국가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16세에 등극해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54년간 집권했다. 그는 황제로서 누릴 것은 다 가진 셈이었다. 무제는 고비사막 이남으로 흉노가 침범할 수 없게 막았고 그의 영토는 진시황의 통일제국보다 두 배가 넘었다. 법을 다루고 집행하는 데에 있어서는 더욱 조밀하고 가혹했다. 그래서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2에 한 무제의 악행이 거의 진시황에 근접했다고 평했다. 다만 무제는 시비를 가릴 줄 알고 충언을 받아들여 사람을 쓸 줄 알았으므로 나라가 망할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십 년간 흉노와의 지속적인 전쟁과 국토 확장 등으로 나라의 곳간이 비니 한 무제는 혹리(酷吏)를 동원해 재정을 충당하기도 했다. 사마천이 『사기(史記)』 「혹리열전」에서 다룬 12명의 관리 중 10명이 무제 때 사람이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제는 혹리 장탕(張湯) 같은 무리를 중용했지만 한편 급암(汲黯) 같은 사직지신(社稷之臣)을 알아보고 그들의 말을 경청할 줄 알았으며 존중해주었다. 정승 공손홍(公孫弘)은 황제의 입맛에 드는 말로 출세해온 사람이라 처세술에 능했다. 어느 날 급암은 황제 앞에서 공손홍은 삼정승의 지위로 높은 녹봉을 받으면서도 무명 이불을 덮을 정도로 교활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황제가 물으니 그는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능청스럽게 답했다.

“급암이 없다면 폐하께서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무제는 공손홍을 벌하지 않았지만, 존중하지는 않았다. 대장군 위청(衛靑)이 왔을 때는 변기에 앉아서도 만났고, 승상 공손홍이 왔을 때는 관모를 쓰지 않고 만났다. 그러나 급암이 궁에 들어오면 언제나 의관을 갖추고 정좌하여 만났다. 황제는 급암을 존경했지만 우직하고 직설적인 쓴 소리가 싫었다. 결국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회양(淮陽)의 태수로 결정했다. 급암은 황제 곁을 떠나면서 이식(李息)을 찾아가 간절하게 부탁했다.

“나는 버림을 받아 태수로 나가게 된 까닭에 조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소. 어사대부 장탕은 간사한 지혜로 직언을 가로막고 속임수로 자신의 비행을 가릴 수 있소. 그는 오로지 폐하의 비위만 맞추고자 하는 것이 그렇소. 폐하가 원치 않는 사안이면 비난하고 폐하가 원하는 사안이면 칭송하는 식이요. 일을 꾸며내기 좋아하고 법조문을 멋대로 농간하고 있소. 조정 내에서는 사술(詐術)로 폐하의 마음을 조정하고, 조정 밖에서는 도적 같은 관원인 적리(賊吏)를 부리며 위세를 떨치고 있소. 공(公)이 지금 구경(九卿)의 대열에 있으면서 일찌감치 이를 상주하지 않으면 장탕과 함께 주륙(誅戮)을 당할 것이오.”

그러나 이식은 장탕이 두려워 황제에게 감히 고하지 못했다. 훗날 장탕이 실각하자 무제는 급암과 이식이 나눈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처벌한 뒤 급암에게는 죽는 날까지 재상이 받는 녹봉으로 대접했다. 무제는 이처럼 잔인하고 무서웠다. 그러나 사람을 알아보고 언론의 자유를 허락했다.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무제의 리더십을 부러워한다면 이야말로 우리의 비극이 아닌가!

반고의 『한서 열전』 「하후승」편의 이야기이다. 한나라 유방과 유항만이 묘호(廟號)가 있었고 나머지 임금들은 시호(諡號)만 있었다. 유방의 묘호는 고조(高祖)이고, 그 아들 경제 유항은 태종(太宗)이었는데, 선제(宣帝, BC74~BC49)가 등극하고 난 뒤 증조부 한 무제의 묘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조정에서 논의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런데 하후승(夏侯勝, BC152~BC61)이 반대하고 나섰다.

“무제께서 비록 사방의 오랑캐를 물리치고 국토를 개척하여 넓은 공은 있지만, 군사와 백성을 많이 죽였고 백성의 재물과 힘을 고갈시켰습니다. 사치가 심해 나라의 재정이 헛되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유리걸식하여 죽은 백성이 너무나 많습니다. 메뚜기 떼가 크게 일어나 수천리가 황폐한 땅이 되었고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기도 하는 등 오랜 폐단이 지금껏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푼 것이 없으므로 종묘에 음악을 새로이 설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기서 종묘의 음악이란 묘호를 정한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하후승은 많은 신료들에게 비난받았다. 이에 “황제의 명령이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신하된 도리로는 마땅히 직언하고 정론을 펴야 합니다. 구차하게 황제의 뜻에 아부하면 안 됩니다. 뜻이 이미 내 입 밖으로 나왔으므로 비록 죽어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결국 무제의 묘호는 세종(世宗)으로 정해졌고, 하후승은 2년간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훗날 선제는 “하후승은 묘호를 반대한 일에 괘념하지 말고 계속 바른 말을 다하라”고 했으니 하후승의 인격과 성품을 알만하다.

우리나라도 수양과 학문으로 보면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정치인이 있었다.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이 그런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가오는 왜란을 앞두고도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으로 서로를 포용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율곡이 ‘10만양병설’을 진언했을 때 유성룡은 뜻을 합치지 못한 채 “개혁은 좋지만 그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당쟁과 진영 논리에 함몰되어 인격과 경륜에 걸맞은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와 다른가? 지금 우리는 정치, 언론, 사법기관, 재계, 교육, 시민 모두가 그 본질과 권위를 상실했다. 훗날 우리는 질과 양의 차이는 있으나 공범자라는 비난을 빗겨갈 수 없을 것이다. 늦었지만 우리는 준엄한 역사인식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청산하지 못한 현실은 또 한 번 몸서리쳐지는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광화문의 질서정연한 함성을 가슴에 새기면서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이 사건을 단지 사건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체험적 현실을 뼈아프게 각성하고, 후손에게 부끄러운 나라를 계승시킬 수는 없다. (2016. 11. 04)

 

* 이 글은 2016년 11월 9일자 인천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