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측천무후(則天武后)

  • 날짜
    2017-01-17 10: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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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권력을 자행(恣行)한 일은 적지 않지만 다음의 세 사람을 손꼽을 수 있다. 항우(項羽)와 결전해 전한을 세운 유방(劉邦)의 부인 여후(呂后, BC241~180)와 청나라 함풍제(咸豊帝)의 후궁이지만 뒤에 서태후(西太后)라 불리게 된 자희태후(慈禧太后, 1885~1908), 당나라 태종의 재인(才人)이었다가 그의 사후 아들 고종의 후궁으로 황후가 됐다가 스스로 주나라를 세워 여황제가 된 무측천(624~705)이다. 여후와 서태후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지만 황후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스스로 황제가 됐다는 점에서 한번쯤 고찰할 필요가 있다. 

측천은 14살에 처음 궁궐에 들어와 태종의 재인이 된다. 당시 황제 처첩의 품계는 본처인 황후, 1품인 비가 4명, 2품 빈 9명, 3품 첩여 9명, 4품 미인 9명, 그리고 재인이 9명이다. 태종이 재인이라는 낮은 품계에 있었던 측천에게 무미랑(武媚娘)이란 이름을 지어줬던 것으로 보아 퍽 귀엽게 여겼던 것 같다. 


어느 날 목덜미에 사자 모양의 갈기가 있어 사자총이라고 부르는 말이 있었다. 태종은 이 말을 무척 좋아했으나 성질이 포악해 도무지 길들일 방법이 없어 고민했다. 이때 측천이 말하길 `제게 쇠채찍, 쇠망치 그리고 비수 3가지를 준비해주시면 저 말을 길들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태종이 `어떻게 하면 그리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무측천은 `폐하! 이 말은 성질이 사나우니 특별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소첩은 우선 쇠채찍으로 때리겠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쇠망치로 머리를 내리치겠습니다. 만약 끝까지 순종하지 않는다면 비수로 찔러 버리겠습니다.`

이 말에 경악한 태종은 `너 참 대단하구나`라고 한 마디를 하고 자리를 떴다. 이는 측천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이야기이지만, 스스로 술회한 것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측천 자신이 스스로의 잔인함을 드러내 공포정치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측천은 비빈 중 가장 말단에서 12년 간 고독한 세월을 보냈다.  
태종이 병석에 눕자 태자 이치(李治)가 병문안을 위해 자주 드나들었다. 그 사이 태자는 병수발을 들고 있는 측천에게 마음을 홀리게 됐다. 태종이 승하하자 측천은 당시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이때 측천은 황제 고종에게 시 한 수를 적어 보낸다. `看朱成碧思紛紛(붉은 색이 푸르게 보이는 건 심란한 마음의 탓) 憔悴支離爲憶君(초췌해진 몰골은 님 생각 때문이지요) 不信比來長下淚(날마다 흘린 눈물 믿기지 않으신다면) 開箱驗取石榴裙(이 상자 열어 다홍치마 눈물자국 보시지요)` 

이 시를 <여의랑(如意娘)>이라 하는데 훗날 이백(李白)도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절한 사이라 해도 아버지의 여인을 궁으로 들이기는 첩첩산중이었다. 고종의 정비인 왕(王) 황후는 모든 것을 갖췄지만 단 하나 아이가 없었다. 고종은 소숙비(蕭淑妃)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뒀는데 다섯 살난 아들을 옹왕(雍王)으로 책봉하니 장차 태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옹`이란 황제가 있는 수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황후는 가문이 미천했던 측천을 궁으로 들여 소숙비를 견제할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궁으로 들어온 측천은 소숙비는 물론 황후마저도 폐위시켰다. 

측천이 딸을 낳자 왕 황후는 인사차 측천의 침소에 들러 축하를 하고 돌아갔는데, 이 기회를 틈타 측천은 갓 태어난 자기 아이를 엎어놓아 죽게 만든 뒤 그 죄를 황후에게 돌렸다. 왕 황후와 소숙비를 폐위시키고 황후가 된 측천의 나이는 32살이었다. 14살에 궁에 들어와 18년 만에 일차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남편 고종은 정치판을 새롭게 일신하고 싶었다. 그의 전반생은 줄곧 타인의 통제 속에 있었다. 형들의 권력 다툼 때문에 운 좋게 황제에 등극했지만 태자 때는 아버지 태종의 그늘에 가려 있었고, 그 다음에는 선왕이 임명한 원로대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권력 없는 황제의 고단함과 무기력에 지친 고종의 불만을 알아차린 측천은 황후의 본분에서 벗어나 정치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명령은 고종이 내리지만, 막후에서 공작을 진행했다. 다시 말해 황제의 비선 실세가 된 것이다. 


태자 이충(李忠)을 후궁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몰아내고 고종과 자신의 장남 이홍을 태자로 등극시킨다. 다음은 왕 황후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후가 될 때 반대했던 저수량, 장손무기(長孫無忌), 상관의(上官儀) 등 훈귀대신들을 역적의 누명을 씌워 차례차례 잔인하게 처벌하고 그 후손과 친척까지 죽여 후환을 없앴다. 또 궁의 후미진 곳에 갇혀 지내던 왕 황후와 소숙비를 잔인하게 죽였다. 측천은 조정의 요소마다 한문(寒門) 출신의 신흥세력으로 채워 이들로 하여금 고종의 신하가 아니라 자신의 손발이 되도록 만들었다. 비선 실세들이 공조직으로 들어와 조정을 측천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됐다. 

앞서 측천의 첫 딸은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설명했다. 측천은 고종과의 사이에 4남2녀를 뒀는데 이 중 태자 이홍은 병약하고 정서적인 성격이어서 후궁에 갇혀있던 왕 황후와 소숙비를 동정하는 소를 올렸다가 측천에게 미움을 사서 죽었다는 설이 있다. 장남이 죽고 차남 이현(李賢)이 태자가 됐으나 능력이 출중하고 주체성이 강한 인물이어서 비선정치를 행하는데 장해물이 됐기 때문에 처단하고, 셋째 이철(李哲)과 넷째 이단(李旦)이 각각 두 번씩 황제에 올랐다가 폐위당해 중종(中宗), 예종(睿宗)으로 칭해졌으나 죽은 사람처럼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중종이 일찍 죽고 막내아들 예종마저 어머니 측천에게 황제에 등극하라 권하면서 자신에게는 이씨 대신 무(武)씨 성을 내려달라는 실정이었다. 측천이 67살에 황제에 오르니 이가 바로 주나라 초대황제 무조다. 측천은 황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남창(男娼)을 뒀으나 황제가 된 후부터는 이를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당연하게 행동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관작을 내리고 실권을 줘 총애하니 재상도 이들 앞에서 아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들 중에 제일 유명한 남창이 장이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형제인데 측천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비선실세인 이들의 횡포가 심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나라 종실 이씨의 후손들이 여러 곳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반역에 참여한 이씨들은 독사 중 하나인 살모사 훼씨로 성(姓)을 바꾸라는 준엄한 명령이 내려졌다. 측천의 치세는 참을 수 있어도 남창의 정치농단을 참을 수 없었던 장간지(張柬之, 625~706), 대장군 이다조(李多祚), 태평공주, 막내아들 이단 등이 중심이 돼 장씨 형제를 처단하고 나니 측천 퇴진은 자연스러운 부산물로 얻어진 것이다. 이어 셋째인 이철이 중종(中宗)으로 등극했으나 부인 위 왕후(韋皇后)와 딸 안락공주(安樂公主)에게 독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난다. 이 역시 위 황후와 안락공주가 비선으로 활동해 부패하고 공조직을 황폐화시킨 결과라 하겠다. 


이 소식을 들은 넷째 이단과 그의 아들 이융기(李隆基) 등이 궁 안에 들어가 위 황후와 안락공주 일파를 처단하고 황제에 오르니 이가 바로 예종이다. 예종은 3년 후 자신의 셋째 아들 이융기에게 양위하니 그가 바로 개원의 치(開元之治)를 시작한 현종이었다. 측천은 자신을 고종과 함께 묻어달라는 유서를 남겨 주나라 황제가 아닌 고종의 부인으로 섬서성 건현 서북쪽에 있는 건릉(乾陵)에 묻혔다. 능의 서쪽에 있는 측천의 비에는 글자가 없어 무자비(無字碑)라고 칭한다. 무자비는 측천의 유언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보아도 비록 측천이 악독할 만큼 권력을 추구한 여인이었지만, 자기를 반성할 줄 아는 양심은 있었던 것 같다.

당 태종을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이자 명군으로 추앙받도록 도운 10인 중 한 명으로 부인 장손황후(長孫皇后, 601 ~ 636)가 손꼽힌다. 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태종은 `훌륭한 참모를 잃었으니 애달프기 그지없구나. 장손황후는 언제나 옳은 말을 해 짐의 모자란 곳을 메워줬는데 이제는 누가 직언으로 나를 채워줄 것인가`라면서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이복오빠인 장손무기는 태종의 친구였지만,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재상이 되면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만일 동생이 황후인데 외척이 재상이 된다면 그 자체가 비선실세가 되고, 그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부패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장손황후는 알았던 것이다. 역사 속에서 장손황후가 지금까지 흠모의 대상이 되고 존경받는 이유다.

 

* 이 글은 2017년 1월 11일자 인천일보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