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미·중 사이에 갇힌 한국미·중 사이에 갇힌 한국

  • 날짜
    2017-03-08 17:2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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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주군(主君)을 황제라고 칭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오직 우리만이 언제나 불가능했다. 주권 없는 나라에서 살다 가는데 죽음이 어찌 대단하랴. 울지 마라!` - <성호새설(星湖僿說)>에서.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선생이 운명을 앞두고 슬피 우는 가족들을 나무라며 한 말이다. 동시에 이 말은 중국에 종속된 조선왕조의 주체성과 독립에 대해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임제의 간절한 소망은 그가 서거한 지 300여년이 지나 1897년 2월 대한제국 수립이 선포되면서 이뤄졌다. 고종이 황제에 올랐고 건국 이래 처음으로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비록 현실 상황에서는 저물어 가는 나라였지만 이때 처음으로 형식만큼은 독립된 나라가 됐다. 그러나 13년 후인 1910년 8월29일, 고종 황제는 일제의 강압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용상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 후 온 나라 백성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3·1운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세습왕조가 아닌 민주공화제를 선언했다. 해방 이후 제헌헌법부터 상해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정 정신을 이어받아 헌법 제1조 1항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하고, 2항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천하 만민에게 고했다. 지난 70여년 동안 수 차례에 걸쳐 개정됐으나 이 항목만은 변함없이 빛나고 있다. 임제가 그토록 희구하던 자주독립을 이뤘고, 나아가 민(民)이 주인 되는 민주공화국이 된 오늘을 하늘에서 지켜보는 그의 소감이 어떠할까?

세상이 경천동지해 그 혼돈 속에서 이름 없는 시민들이 깨어나고 있다.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뛰는 심장으로 자각하고 있는 현장에서 스스로 수많은 촛불이 돼 환하게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역사의 고비에 서 있다. 먼저 주위의 나라들을 살펴보자. 중국은 1978년부터 2012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9.8%에 이르고 있다. 국내총생산은 2015년 이미 11조달러를 돌파했고, 2014년 구매력 기준으로 보면 미국을 추월했다는 보고서도 나와 있다. 1인당 GDP가 아직 8100달러에 머물러 있다지만 외환보유액은 부동의 세계 1위다. 인구 또한 14억이 넘어 규모만으로는 현재 세계경제의 생산·투자·무역의 중심국가가 됐다. 하지만 군사력과 지도력은 아직 미국에 뒤처져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영국에서 미국으로 패권이 전이될 때 미국은 이미 1870년대 영국의 경제력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미국이 진정한 패권국이 된 것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였다. 

중국은 사드(THAAD)의 한국 배치가 결정된 뒤부터 한국에 대한 신보호주의적 무역보복을 전방위적으로 가하고 있다. 사실 중국의 보복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돼 왔으나 한국정부는 국민을 안심시키고 납득할 만한 대책을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America First`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신고립주의와 보호주의의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의 민심은 대통령에게 외교보다 내치에 치중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미국정부 역시 당연히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미국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빈곤과 실업이 외국 노동자나 FTA 같은 자유무역제도에 따른 것으로 생각한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경쟁으로 미국은 동아시아에 대해 기꺼이 경제 원조와 넉넉한 수출시장을 제공해줬다. 냉전은 우리에게 분단을 선사했지만, 그 덕분에 한국은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수출주도 산업화 전략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탈냉전과 세계화시대가 되면서 미국은 기존의 우호적인 통상정책에서 벗어나 공격적 상호주의, 공정무역, 보호주의 통상정책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올 3월1일 미 무역대표부가 발표한 무역정책 어젠다 보고서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무역기구가 아닌 미국법을 따라야 미국과 계속해서 교역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철저히 미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 싼 미국과 중국의 정책이 바뀌면 우리처럼 대외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새로운 자구책을 찾기까지 증대해가는 손실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또 이들의 패권경쟁 사이에서 한국은 방향을 잃을 수 있다. 미국은 전통적인 우방이자 안보동맹을 맺고 있는 사이이고, 중국과는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역사가 있고, 무엇보다 긴밀한 경제협력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이념을 통해 적과 동지의 구분이 명확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21세기 신냉전시대가 시작되면서 이제는 이데올로기보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그 바탕이 되기 때문에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게 됐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중국은 과거 구소련처럼 고립돼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과 긴밀한 경제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 둘 중 어느 한 나라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 처지는 매우 곤란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았던 해양세력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경제력이 막강한 경제대국이자 우방이다. 그러나 같은 전후 패전국이었다 하더라도 독일의 전후 처리와 역사 청산을 위한 노력과 비교했을 때 일본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양국 학생이 공동으로 사용할 교과서를 편찬했을 때, 프랑스는 독일이 5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기록했는데, 당사자인 독일은 도리어 이보다 많은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의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가 보여준 진정한 사과의 자세는 1·2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유럽 각국의 시민들이 독일을 진정한 우방으로 신뢰하는 계기가 됐다.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세습왕조로서 국가흥망의 생사를 핵 개발에 걸고 민생은 뒤로 제친 나라다. 냉전 해체 이후 북미관계 개선의 호기는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양국은 번번이 이를 놓쳐버렸고, 결국 북핵 위기라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때 대북 강경파들이 범하기 쉬운 우(愚)가 두 가지 있다. 우선 북한이 쉽게 자멸할 것이란 예측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이 붕괴할 경우 벌어질 일련의 상황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다. 이후 벌어질 상황을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면 북한의 붕괴는 최악의 위기가 될 가능성도 농후하기 때문이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평화밖에 없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되새겨야 한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은 일시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보는 미국에 의탁하고 시장은 중국에 의존한다는 식의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우리민족의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치지도자들은 이 같은 신념과 책임의식을 국민 앞에 펼쳐보여야 한다. 꼼수나 눈치만 보아서는 절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프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온 국민의 협력을 요청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도 활로를 찾기 어려울 때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국가의 주권을 잃었을 때, 수많은 애국선열이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만주 벌판에서, 또 옥중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다 이름도 없이 죽어간 이유는 조국의 광복과 자유, 민주, 평화를 갈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소중한 자신을 초개와 같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처한 가장 큰 모순과 아픔은 분단에서 시작한다. 당장의 통일은 힘들지만 실천 가능한 것들부터 조용하게 남북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어떤 일이든 근본부터 시작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나라를 지켜왔던 것은 권력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보통사람들이 앞장섰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한다. 

국권을 일제에 빼앗겼을 때 집안의 여섯 형제들이 의논해 집과 땅, 재산을 모두 팔아 그 돈으로 만주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경학사(耕學社)라는 결사체를 세우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10년 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을 이끈 인재들을 길러낸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1867~1932) 선생 일가의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국민은 정부나 권력이 아닌 나라와 민족에게 충성해야 한다. 그런 국민이 이 나라의 기초를 이룰 때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슬기와 용기가 생겨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