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진정한 거인의 뒷모습-松巖 李會林 선생 탄생 100년

  • 날짜
    2017-08-23 10:4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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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5월 9일생이신 송암 선생님 탄생 100년을 맞이하여 평소 마음 속 스승으로 모셨던 또 누구보다 많은 아낌과 격려를 받은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 상념이 떠올랐다. 

새얼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계간 <황해문화>(1994 가을호)에 `원로를 찾아서`라는 인터뷰가 있었다. 

제목은 `마지막 松商 松巖 李會林 회장`이었다. 인터뷰는 인하대 국문과 최원식 교수가 진행했지만 나 역시 곁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송암 선생의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읽어도 바로 어제 우리 곁에서 말씀을 들려준 것처럼 생동감 있게 살아 꿈틀거리는 결기가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간추려 소개하면 송암 선생은 먼저 이 나라와 경제를 걱정했다.  

기업이 경영을 오픈해야 한다. 정부는 백년 계획은 못 세우더라도 적어도 십년 앞을 내다보고 개혁을 해야 하지 않는가. 장관은 자리를 걸고 소신 있게 정책을 추진해야 하고, 경제인은 사회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 성공리에 치러진 88올림픽 이후 해이해진 국민정신을 걱정했다. 또 상여금은 힘들더라도 쓰지 말고 무조건 저축하는 풍토를 주창하셨다. 

`선생님을 송상(松商)이라고 하는데 송상의 정신이 무엇인가요?`라고 묻자 선생은 서슴없이 `첫째, 송상은 신용을 생명으로 하고, 둘째, 저축정신이 강하다`라고 하면서 `셋째로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나서 고려의 지식인들이 사업에 참여했다. 그래서 개성상인이 발전했다`고 했다. 송도는 반조선왕조의 기풍이 강한 곳이라 하면서 지금까지도 송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개성을 장안이라 부르고, 서울 가는 것을 내려간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미소 짓기도 했다. 그 미소 속에 송상의 정신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삼(蔘)은 개성 삼만이 삼이라 하시면서 다른 지역에선 3년, 4년, 5년삼이지만 개성삼만은 6년삼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말씀 속에 송도인의 긍지가 서려있는 듯 했다. 

개성에 있는 송남서관(松南書館)은 오늘날의 교보문고보다 크다고 강조하면서 확신에 차 말씀하는 것을 보니 역시 고향을 생각하는 그리움이 얼굴에 스며있었다. `동양화학`을 설립한 동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왜정시대에는 포목전을 하다가 해방 후에는 문경새재에서 문경시멘트 제비표 공장을 했지. 이것은 너무 단순해서 사업이라고 할 수 없어. 사업은 걱정이 되어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된다고 생각이 들어 걱정 없이 돈을 지속적으로 벌 수 있는 시멘트 회사를 팔고 걱정거리 동양화학을 시작했지. 그러면서도 나는 환경문제를 먼저 생각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했어.` 안주하지 않고 험난하지만 스스로 노력하고 연구하는 사업을 추구했다는 당신의 기업가 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인물로는 경제를 부흥시킨 박정희 대통령과 죽산 조봉암 선생을 급수가 다른 정치인이라고 꼽으셨다.  

인천시민으로서 선생께 항시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첫째, 서울에 있던 송암미술관을 새롭게 신축해 인천으로 이전하여 인천시민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했고, 선생께서 오래도록 아끼며 수집해왔던 수많은 고미술품(古美術品) 8450점을 인천시민에게 아낌없이 쾌척했다는 사실이다. 돈이 있다고 누구나 고미술품을 애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품위 있는 소신과 취미와 열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세월과 함께 손때가 묻은 애정이 깃든 작품을 넘겨줄 때의 심정은 어느 젊은 예술인이 진정 사랑하던 연인을 잃은 아픔보다 더한 남모르는 서운함과 고통을 겪으셨으리라 느껴진다.

더욱 놀란 것은 그렇게 아끼던 미술관을 인천 시민에게 넘기고 난 뒤에도 송암 선생은 거금을 들여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숙종 2)∼1759(영조 35))의 <노송영지도(老松靈芝圖)>를 구입해 추가로 선물했다. 이러한 면모는 진정한 거인의 뒷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후학들이 따라야 할 정신이라 하겠다.  

특히 선생님은 평생 수집한 미술품을 인천시민에게 아낌없이 헌납한 후 그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북한 작가들의 작품을 어렵게 하나하나 모아 500여점이 되자 <북한유화전(北韓油畵展)>으로 엮어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혜안이 아니었다면 북한미술계의 일면이나마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통일의 준비는 이처럼 소리없이 시작한 것이라 생각하니 존경심이 더욱 깊어진다. 

또 송암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인천에서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을 인천대공원에 조성하면서 민족정기를 더욱 뿌리 깊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지금 후배들이 사용하고 있는 신축건물의 토대를 조성해주었다. 또한 선생님의 대를 이어 이수영 회장이 그 자리를 맡아 인천상공업계를 크게 발전시킨 것은 인천상공회의소의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선생님의 인터뷰를 다시 꺼내 읽으며 느낀 것은 큰 어른의 정신과 말씀은 향기 있는 고전처럼 언제나 새롭고 뜻이 있는 넓은 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송상, 송암 이회림 선생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거인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