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0년 백일장 산문부문 장원작품(초등3.4학년~ 어머니부)

  • 날짜
    2010-04-28 09: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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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3·4학년부 산문 장원>

새싹

인천 송현초등학교 4학년 5반
김태연

학교에 가기 위해 동생과 집 밖으로 나왔다. 아침 공기 사이로 텃밭에 뾰족하게 새싹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다. 며칠 사이 아무 것도 없었는데 오늘 보니 제법 많이 올라와 있었다. 새싹을 보니 할머니가 생각났다.
우리 할머니는 송현시장에서 장사를 하신다. 할머니는 텃밭 가꾸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신다. 할머니는 장사를 하셔서 집에 늦게 들어오신다. 그리고는 창 밖 전선으로 백열등을 연결해서 그 빛으로 저녁에 텃밭을 일구신다. 상추, 고추, 미나리 등등…. 그리곤 항상 내가 좋아하는 꽃을 한쪽에 심어 주셨다. 작년에는 봉숭아, 철쭉 그리고 해바라기도 심어 주셨다. 그래서 손톱에 봉숭아도 물들여 보고 내 키만큼 자란 해바라기를 보면서 신기해 하며 기념사진도 찍고 해바라기씨도 맛보았다. 마트에서 파는 해바라기씨 보다 열 배, 백 배는 맛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아직 텃밭이 가득 차지 않았다. 할머니의 몸이 점점 안 좋으신지 요즘은 장사가 끝나고 집에 오시면 바로 주무신다. 몸이 힘들다면서 어깨에 파스도 붙여달라고 하신다. 그런 할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할머니가 하루 빨리 건강해지셔서 우리 집 텃밭이 채소와 꽃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식구들끼리 모여 앉아 오순도순 얘기도 하고 삼겹살에 맛있는 상추쌈도 듬뿍 싸서 먹었으면 좋겠다. 하루 빨리 텃밭에 새싹이 자랐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초등5·6학년부 산문부 장원>

인천 송현초등학교 6학년 6반
양한나

2002년 월드컵이 열렸던 때였다. 그때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사촌오빠와도 같이 살았는데 오빠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할머니가 딸 네 명, 아들 한 명을 낳으셨는데 그 아들이 우리 아빠다. 할아버지께선 그래서 나만 예뻐하셨다. 그때의 기분은 꼭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유독 엄마, 아빠보다 할아버지와 닮은 점이 많았다. 어쩌면 할아버지와 같이 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특히 난 완두콩을 너무 좋아했다.
다른 콩들은 고소하지만 숲 속의 색을 가진 완두콩은 자기만의 맛을 가졌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도 완두콩을 좋아하셨다. 엄마와 할머니가 밥을 주실 때 다른 사람의 밥은 듬성듬성 초록 열매가 보였지만 할아버지와 나의 밥그릇에는 초록 열매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난 충격의 말을 듣게 되었다. 할아버지께서 대장암에 걸리셨다는 거였다.
엄마는 “한나야! 할아버지께서 병에 걸리셨어. 그래서 오래 살지 못하실 것 같아….”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땅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엄마의 눈 주위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닐 거야! 할아버지는 나랑 오랫동안 사신다고 했어!’ 그러나 내 뺨엔 이미 주룩주룩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아시면 슬퍼하실지 모른단 생각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 지셨다. 할아버지와 밥을 먹을 때면 꼭 물에 밥을 말아 드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한 숟가락 드시는 것도 힘들어 하셔서 슬펐다. 계절이 바뀌고, 할아버지는 위독해지셔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몇 주일 뒤 할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여행을 떠나셨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았을 때 난 소리쳤다. “할아버지! 나랑 완두콩 밥 먹기로 했잖아!” 하며 울었다.
나는 밥을 먹을 때 마다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이 생각난다. “할아버지! 잘 계시지요? 나중에 만나면 행복하게 같이 밥 먹어요!”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그래서 나는 가끔 밥을 먹을 때 미소를 짓곤 한다.

 

 

<중학교부 산문 장원>

아파트

부광중학교(인천) 3학년 1반
이채영

3월 봄, 분명 따스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유독 쌀쌀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하늘에서, 피어야 할 노란 꽃 대신 차가운 눈꽃송이를 내려 주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집에 걸어가다 보니 눈의 차가움이 내 몸에도 물들었는지 기운이 빠지고 힘이 없었다. ‘학원 제일 많이 가는 날인데 … 빠진다고 말해볼까 … ?’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집에 들어서자 열 켤레는 족히 될 듯한 신발들이 눈에 띈다. 가지런하지 못한 그 모습들을 보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우리 엄마는 집에서 공부방을 한다. 아빠가 벌어오는 돈만으로는 생활이 여유롭지 않아서 엄마가 부업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대여섯 명 뿐이었는데 지금은 계속 늘어나 스무 명이나 된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일매일이 짜증났다. 학교에 지쳐 집으로 돌아오면 어린애들이 집안을 싸돌아다니며 시끄럽게 떠들어 댔기 때문이다. 특히 냉장고 안을 뒤지거나, 안방 문을 열 때면 정말 화가 났다. ‘뭐 저렇게 예의 없는 애들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그 ‘예의 없는 애들’이 내 방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정말 짜증이 나다 못해 화가 솟구치기 시작했고, 나는 달려가 그 아이를 밀었다. 그러자 넘어진 아이가 울기 시작했고, 곧 엄마가 다가와 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아, 오늘도 그냥 넘기질 못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공부방을 시작한 뒤로부터 정말 하루도 싸우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는 것 같다. 오늘도 엄마는 공부방에 오는 애를 위로하고 나에게만 소리친다. 내가 화를 내는 이유도 다 알면서 정말 지겹다. 이젠….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다보니 머리뿐 아니라 온몸이 아파온다. 그리고 나는 집에 오는 내내 생각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엄마, 오늘 학원 안 갈래요.”
그러자 엄마는 나의 말을 시작으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뭐? 너 지난번에도 안 갔잖아!”라는 말부터 ‘이유가 뭔데, 넌 왜 애가 그 모양이니’까지….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 엄마와 많이 싸우고, 많이 혼나는 만큼 처음에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상처를 받던 내 마음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엄마의 말을 받아내고 있었다.
내가 그냥 밥 먹고 바로 양치를 하듯 익숙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때 그런 내 귀를 번쩍하게 한 말이 엄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넌 학원비가 그냥 나오는 것 같아! 돈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지! 응?”
순간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 집이 힘들어진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내 학원비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다니는 학원은 한 달에 백만 원대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을 내고 다니는 곳이다. 엄마는 항상 내게 돈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다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엄마가 뒤돌아서며 내쉬는 한숨을 들었기에 엄마의 그런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내게 이렇게 대놓고 돈 얘기를 꺼낸 적이 없던 엄마였는데 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화를 냈다. 엄마는 그런 내 모습에 더 화가 났는지 겉옷을 집어 던지며 한 손엔 학원 가방을 들고는 나를 현관 쪽으로 끌어 당겼다.
“빨리 가라고!”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계속 버티고 있자 이제는 나를 때리며 집 밖으로 밀어냈다.
“그냥 죽자, 응? 우리 그냥 같이 죽을까!”라고 엄마가 소리치는 그 순간, 난 현관을 뛰쳐나가 옥상으로 올라갔다. ‘죽으라고? 내가 죽으면 우리 집은 좀 편해질까? 엄마랑 매일 싸우지 않아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옥상 난간에서 밑을 내려다보자 조금씩 내리던 눈이 어느새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 눈을 보자 어릴 적 우리 집 형편이 넉넉했던 어느 날의 겨울이 생각났다.
아빠가 벌어오는 돈만으로도 걱정 없이, 다툼 없이 지냈던 따스한 날들 말이다. 그 때의 엄마는 항상 웃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말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까 울며 소리치던 엄마 역시 떠올랐다. 사실 생각해보면 가장 힘든 것은 엄마일 것이다. 애들을 가르치며 돈을 벌기 위해 화나는 일이 있어도 참고, 현관을 어지럽히던 신발들이 남김없이 빠져 나갔을 때가 되어서야 한숨짓던 그 얼굴이 나를 더욱 아프게 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해서 그런다는 것, 나 역시도 알고 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기에 한숨을 쉬며 옥상 밑의 세상을 또 내려다보았다. 빽빽한 다른 아파트들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편안함뿐이었다. 같은 아파트임에도 우리와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는 듯 우뚝 솟아 있는 그 모습이 우리 엄마에게는 ‘일터’로 쓰이는 아파트와 너무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편한 곳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생각이 들자 차갑게만 느껴졌던 눈의 모습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 같이 말이다. 이제야 진짜 3월, 우리 가족에게도 봄이 올 것만 같다.

 

 


<고등학교부 산문 장원>

안양예술고등학교(안양) 2학년 5반
장혜리

구피가 또 새끼를 낳았다. 꼬리부터 머리까지 완전히 어미의 몸에서 빠져나온 새끼는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힘없이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기만 했다. 또 다른 새끼가 나오고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새끼를 향해 어미는 입을 벌린 채 헤엄쳐 갔다. 새끼는 어떻게 알았는지 재빨리 어항 바닥으로 숨어버렸다.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생존을 위해 몸을 숨겨야 하는 구피. 이것은 자신의 어미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본능이었다. 새끼 구피의 연한 파랑색 작은 몸이 내 신경을 꾹꾹 눌러댄 건 그들의 생태가 우리 집과 비슷하다는 걸 느꼈을 때였다.
‘띠리리링’ 전화가 왔지만 난 받지 않았다. 우리 집에 전화를 걸 사람은 유일하게 박 씨 아줌마뿐이었다. 엄마가 또 박 씨 아줌마한테 돈을 빌렸겠지….
좁은 집안을 가득 채우던 전화벨 소리가 멈췄다. 엄마는 언니가 태어나기 전부터 도박을 했단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기 직전까지도 엄마는 어떻게 하면 남의 돈을 딸까 애쓰고 있었다.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아빠와 이혼을 한 뒤로도 도박은 더 심해졌고 어쩌다 가끔 집에 들어올 때면 술에 잔뜩 취한 상태였다. 엄마는 아빠가 매달 보내주는 양육비도 다 도박에 썼다. 엄마는 언니와 내 손 대신 화투짝을 잡았고, 딸의 이름이 아닌 고도리를 외쳤다. 엄마에겐 가족과 따뜻한 집은 없는 것 같았다.
엄마가 늘 도박으로 돈을 잃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땄을 때는 그 돈으로 옷을 사고, 구두를 사고, 핸드백을 샀다. 엄마가 비싼 옷을 입고, 진한 향수 냄새와 술 냄새를 풍기며 집에 들어올 땐 가족이 아니라 손님 같았다. 우리 집에 어울리지 않는 부유하고 넉넉한 손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엄마가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돈을 쓴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구피였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엄마는 자고 있었고, 싱크대 위에는 다섯 마리의 구피가 물 봉지 속에 담겨져 있었다.
어제 있었던 일이다. 철컥하는 소리가 나더니 엄마가 집으로 들어왔다. 내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엄마는 날 보지도 않고 곧장 언니 방으로 향했다.
“유리야, 너 알바한 돈 있지? 그거 엄마 좀 빌려 줘.”
일주일 만에 본 엄마의 인사말치고는 건조했다. 언니가 야간으로 잠도 못자면서 번 돈. 그건 언니의 대학 등록금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해외여행, 어학연수 가느라 휴학 할 때, 언니는 다음 학기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을 해야 했다. 엄마는 그 돈이 언니의 귀한 시간과 맞바꾼 돈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언니가 싫다고 하자 엄마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돈을 잘 따고 있으며, 이번 판이 얼마나 중요한 지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큰 소리로 덧붙였다.
“따따블로 불려서 다음 학기 등록금까지 만들어서 올게.”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엄마에게는 딸의 피 같은 돈이 아니라 자신이 마음껏 써도 되는 주머니 속 눈먼 여윳돈 같아 보였다. 그런 엄마의 모습은 나를 수도 없이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했다.
사람의 지문처럼 저마다 다른 색과 무늬를 가진 구피의 꼬리는 화려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으며 언제 어느 때라도 새끼 따위는 자신의 부속물로 희생되어도 거리낄 게 없었다. 모성결여로 뭉뚱그려 말해도 되는 엄마는 아무리 봐도 구피와 똑같다. 우리 집은 어미 구피가 있는 어항이었고, 어항은 새끼들에게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언니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아침엔 꼭 들어와 밥을 차려주던 언니였다. 언니의 책상 위, 통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언니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 통장이었다. ‘500만’ 원이라고 찍혀있던 숫자들이 어느 새 ‘0’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통장을 잡고 있던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어미 구피는 입을 크게 벌리고 새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미의 아랫배에서 거뭇거뭇한 변이 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새끼를 잡아먹은 것이다. 어미는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지는 배를 채우기 위해 또 다시 새끼들을 위협했다. 나는 어항 유리를 툭툭 치며 어미 구피를 새끼들에게서 떨어지게 했다. 하지만 어미는 또다시 방향을 틀어 새끼들에게 달려들었다.
하필 그때 엄마 생각이 났다. 구피처럼 우리 엄마에게도 가족이란 하나의 먹잇감에 불과한 걸까. 새끼 구피는 커서 어미와 똑같이 화려한 꼬리를 가진 어미가 되겠지만 난 싫다. 자식의 꿈을 살라먹는 엄마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슴 속에서 부르르 일종의 분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 뜨거운 감정이 구피의 탓인 양 노려보았다. 어미 구피는 여전히 아름다운 헤엄을 쳤다. 나는 손을 어항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어미 구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구피는 쉽게 잡히지 않았고 그럴수록 난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끝내 손아귀에 들어온 구피는 몸통을 파닥거렸다. 나는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이용해 어미 대가리를 힘껏 꾹 눌렀다. 툭하고 물컹한 체액이 터졌다. 욕심으로 살찐 배도 드디어 터졌다.
나는 어항을 보았다. 새끼들이 나를 보며 헤엄치고 있었다.

 


<어머니부 산문 장원>

그리운 사람

김은진(인천 계양구 병방동)

한복을 모두 차려입고 외갓집 식구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 한 장 있다. 기억에도 없는  어릴 적 사진이었지만 나에게는 아주 그리운 사람들이 가득 들어있다. 사진의 한가운데에 다소곳이 입술을 꼬옥 다물고 조용하지만 사진 전체를 호령하듯이 지팡이를 들고 앉아계신 증조할머니가 계시다.
어린아이 하나가 외갓집에 갈 때면 제일 먼저 도착하자마자 2층에 있는 증조할머니의 방부터 찾는다. 꼬부랑 허리에 힘드신데도 반갑다고 업어주시던 증조할머니, 언제 넣어 두셨는지 알사탕 하나를 허리춤 주머니에서 가만히 꺼내 주시며 웃던 그 미소! 어떤 이들은 경험해 보지 못했을 따스함과 푸근함이 30년 넘는 세월동안 잊히지 않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증조할머니 옆에 키가 백구십 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시다. 하얀 양복에 하얀 구두를 신고 중절모를 쓰신 아주 멋진 모습.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부릉부릉 오토바이를 타신다. 외갓집 일 층 작은 방에서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소리가 요란하다. 오늘도 할아버지께서 바느질을 하시나 보다. 옛날인데도 할아버지께선 양성 평등사상을 지니셨나 보다. 자상한 말씀을 해 주신 기억은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쟁이라고 기억한다.
그 오른쪽에 외할머니가 서 계신다. 할아버지의 가슴에도 닿지 않는 아주 작은 체구, 고목나무와 매미 같지만 내 동생을 “대장! 대장!” “대장 왔나?”하며 반겨 주신다. 그런 다음에는 항상 바쁘시다. 사위들의 좋은 먹을거리를 챙기시고 특히 아빠가 좋아하시는 안동식혜는 꼬옥 빼놓지 않으신다. 그 시절에는 외갓집 가는 것이 마냥 즐겁고 신나기만 했는데 지금은 한 개의 생각이 더해졌다. 대가족이 자주 모였었는데 할머니는 참 많이 힘드셨겠다.
그 양쪽으로 8남매들이 활짝 웃고 있다. 서로 천생연분들을 만나 원앙새처럼 이마를 맞대고 있다. 사진의 앞쪽으로 들쑥날쑥 조무래기들이 세상 걱정 하나 없는 맑은 표정으로 사진을 채우고 있다. 큰이모네, 큰 외삼촌네, 작은 외삼촌네, 둘째, 셋째, 넷째 이모네, 막내 외삼촌네 이렇게 모두들 한 자리에 모여 시끌벅적 즐거운 놀이터가 된다. 어른 19명, 아이들 17명 이렇게 총 36명이 외갓집에 모인 어느 하루가 그려진다.
몇몇 아이들은 큰 마당에서 아기돼지를 잡겠다며 작은 외삼촌과 함께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또 한쪽에서는 한 아이가 혜은이의 노래 ‘제3한강교’를 엉덩이를 흔들고 손가락을 찔러가며 멋들어지게 부르고 있다. 몇몇 아이들은 연못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옹알이를 한다. 대문 왼쪽 마당에서는 탁구대회가 한창이다. 부부끼리 한 팀을 이루고 함성과 웃음꽃이 계속 이어진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아끼고 함께 해 준 외갓집 식구들.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신 그리운 사람들이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끔찍하게 예뻐하셨던 증조할머니, 세상에서 가장 멋진 외할아버지, 항상 자식들을 챙기느라 바쁘셨던 외할머니. 그립지만 함께 해주신 시간들과 추억이 있어서 따뜻하고 푸근하다. 그러나 마음이 아프고 시린 가족도 있다. 큰이모, 큰이모부, 작은 사촌오빠를 생각하면 가장 마음이 아프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다. 한날한시에 버스와 충돌하는 교통사고로 함께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다. 외갓집 식구들은 울고 또 울었다. 큰 사촌오빠는 군의관으로 군대에 있었고 사촌언니는 장례를 치르며 몇 번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외갓집 식구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큰이모였기에 정말 큰 아픔이었다.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짜안하다. 하지만 사촌언니와 사촌오빠가 무너지지 않고 행복한 모습으로 잘 살고 있어서 참 좋다. 외갓집 식구들이 보태준 힘이 크지 않을까 싶다.
큰 외삼촌과 작은 외삼촌도 일찍 돌아가셨다. 둘째 이모는 간암으로 몇 해 전 세상을 떠나셨다. 어릴 적부터 세심한 것까지 꼼꼼히 잘 챙기시는 이모가 좋았다. 현모양처를 떠올리면 이모가 생각난다. 활동적인 우리 엄마에 비해 참 빈틈이 없으셨다. 결혼 전에도 이것저것 잘 챙겨주신 것은 이모였다. 반찬 만드는 법, 시댁에 대하는 법 등 여러 가지를 일러주셨다. 아프시고 나서 병원에 계신 때 병문안을 갔을 때였다. 얼굴이 좋아지셔서 금방 나오실 것 같았다. 그래서 함께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 가자고까지 하셨다. 그래 놓고는 그냥 혼자 먼 곳으로 가 버리셨다. 그래서 이모 생각을 하면 울컥해 지며 자꾸 눈물이 난다.
이렇게 9명의 소중한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셨다. 그래도 함께 한 시간들과 함께한 추억들이 있다. 사진 속에, 그리고 내 기억 속에….  그러기에 그리움이 있나보다. 결혼하고 난 뒤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추억 만들기가 잘 되지 않는다. 10년을 돌아보니 나의 무심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제부터라도 친정 부모님 또한 시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효도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서 내 아이에게도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따스함과 푸근함을 더 많이 느끼게 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이다. 보고 싶어도 못 보게 되면 마음 한켠은 아프지만 함께한 시간과 추억이 많아야지 그리움도 커지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그리움이 좋다. 그리운 사람들이 좋다.
눈으로 볼 수 없어서 참으로 그립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없어서 참으로 그립습니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진정으로 그립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있었기에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