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새얼전국학생/어머니백일장장원작품

  • 날짜
    2015-04-28 09: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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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장원작품

<초등3·4학년부 시부문 장원>

우리 식구

- 강주형(인천청량초등학교 4학년)

우리 식구의 발은
아빠가 제일 크고
작은 누나가 그 다음으로 크다
그 다음으로 엄마가 크다
큰 누나가 다음으로 크고
내가 제일 작다

지금은 제일 작지만
어른이 되면 내 발이 제일 클 것이다
아마도 키도 제일 클 것이다

 


<초등3·4학년부 산문부문 장원>

우리 식구

- 이예린(인천검암초등학교 4학년)

“엄마! 나 가람예술제 동요부르기 대회 나가보고 싶어. 할머니, 할아버지도 다 같이.”
“안돼! 언제 연습하려고.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같이 나가니?”
엄마는 얼굴을 찌푸리셨다.
‘치……, 엄마는 맨날 안 된대. 치사해.’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지.
“할머니!”
“아이고 우리 강아지…….”
“우리 동요부르기 대회 나가자. 나 꼭 나가보고 싶은데…….”
“……”
할머니는 당황하신 듯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할머니?”
“어……어. 우리 강아지가 하고 싶으면 당연히 해야지. 이왕 하는 거 작은아빠, 작은엄마까지 우리 식구 모두 같이 나가자!”
‘앗싸’ 역시 할머니는 내 편이다. 엄마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그때부터 우리 식구의 동요부르기 대회 연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우쿨렐레 연습을 해서 노래하며 식구들에게 들려주었다. 할아버지는 차 안에서 노래를 들으며 열심히 연습하기도 했다. 때론 할아버지라 그런지 박자를 틀리기도 하고 어떨 땐 막 부르셔서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역시 엄마 예상대로 서로 시간 맞춰 연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드디어 대회 날.
우리가 힘들게 고른 옷까지 맞춰 입고 무대에 올랐다.
“하얀 종이 위에다 아빠 얼굴 그려보고…….”
나의 우쿨렐레 연주와 함께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완전 신나게 불렀다. 대회에 나오길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누가 대상을 탈까?”
“음, 대상은 합창단 같은 데가 받을 것 같고 우리는 장려 정도 타겠지.”
대회가 끝나고 잠시 후 시상식을 했다. 장려, 우수……. 우리의 이름이 안 나오자 실망하고 포기할 때, “최우수상, 이예린 가족!” 식구 모두가 함께한 시간들이 있었기에 더욱 값진 상이었다. 퀴즈대회에 나가서 자전거를 받는 행운도 따랐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우리 식구 모두는 기분이 좋아서 얼굴만 마주쳐도 웃음이 가득했다. 식구들과 함께라면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모든 식구들 감사합니다.

 


<초등5·6학년부 시부문 장원>

버릇

- 오시우(인천논현초등학교 6학년)

나에게는 치명적인 버릇이 있어
엉덩이를 들썩들썩 가만히 있지 못한대요
늘 엄마는 말씀하시죠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는데……”

나에게는 또 한 가지 버릇이 있어
남이 알려준 말을 또 다시 남에게 말하지
늘 아빠는 말씀하시죠
“사내가 입이 무거워야지!”

나에게는 마지막 버릇이 있어
너무 돈을 많이 쓰지
늘 부모님은 말씀하시죠
“손이 무거워져야지.”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엉덩이가 가벼운 것은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야
입이 가벼운 것은
남에게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야
또한 손이 가벼운 것은
마음이 넉넉하기 때문이야

난 좋은 버릇이 많아

 


<초등5·6학년부 산문부문 장원>

버릇

이정윤(함현초등학교 5학년)

나에게는 버릇이 있다. 내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나에게는 아빠를 부끄러워하는 버릇이 있다. 나 스스로 남몰래 아빠를 부끄러워한다. 내 버릇은 많이 심하지는 않다. 하지만 아빠를 부끄러워하는 나 자신이 싫다. 내 아빠는 장애인도 아니고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바로 아빠의 직장 때문이다. 아빠는 건설하시는데 나는 아빠 직장이 걱정된다. 아빠는 지금 육교를 건설하신다. 옷이 흙 범벅이 되어 돌아오시는 일이 종종 있다. 아빠가 오시면 나는 아빠를 안방으로 밀었다.
“언니, 오빠 있으니까 나오지 마요.”
아는 사람만 오면 이 말을 남기고 가기 일쑤였다.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려 해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반대로 행동하였다.
“다른 아빠들은 직장 다니는데…….”
이렇게 중얼거리는 날도 있었다. 우리 아빠를 부끄러워하는 나의 버릇 때문에 아빠에 대한 원망만 깊어졌다. 마음은 이게 아닌데도 말이다.
“정윤아, 아빠 일하는 곳 가자.”
하루는 아빠와 함께 아빠가 일하는 곳에 갔다. 그곳은 커다란 포클레인이 흙을 파고 아저씨들이 물건을 운반했다. 흙먼지도 일어났다.
“으, 이런 곳에서 일해?”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빠는 천식을 달고 사시는데 흙먼지가 많이 쌓인 이곳에서 몸이 불편하실 것이다. 아빠가 걱정되면서도 아빠가 괜히 미워졌다. 마음속에서는 아빠가 너무 미워서 화를 내고 있었다. 돌아온 지금까지도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그 버릇이 또 시작된 것이다. 버릇은 아빠가 미워지게 했다. 흙바람 날리는 아빠의 일터를 누가 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 저녁에 아빠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 곧 면접 볼 거야.”
아빠가 엄마에게 말했다. 사실 아빠에 대한 버릇이 가장 강한 이유는 육교 건설이 끝나면 아빠는 곧 실업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것이다. 실업자가 된다는 것은 내게 큰 창피였다. 청소부를 보면 저런 사람은 창피할 거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아빠가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한다니 솔직히 내 버릇이 생길 만했다. 위험하게 일하고 흙먼지가 바람타자 나는 친구들이 볼까 괜한 걱정을 했다.
“아빠 본 애가 있으면 어떡해.”
나는 중얼거렸다. 부끄러운 나의 버릇은 나도 모르게 내 마음뿐 아니라 행동도 바꾸었다. 내 자신이 생각해도 난 이제 심각하다. 내 버릇은 하지만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어느 날 저녁부터였다. 아빠는 힘겹게 약을 드시고 계셨다. 나는 우연히 보게 되었다. 아빠의 힘겨운 모습은 내게 힘들게 하는 마음이 되었다.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노력하는 것도 모르고 아빠를 미워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아빠를 부끄러워하는 버릇은 차츰 사라져갔다. 나는 그 버릇을 그 순간을 생각하며 없애고 있다. 가끔 버릇이 불쑥 튀어나오지만 나는 노력한다. 곧 아빠는 면접을 본다. 면접을 보는 아빠가 열심히 일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면접관이 알았으면 한다.
“아빠, 파이팅!”

 


<중등부 시부문 장원>

들꽃

- 박윤진(인천원당중학교 3학년)

아직은 신선한 새벽바람을 맞으며
게으른 달팽이 마냥 걷는다

아무 생각 없이 기찻길 따라
걷다보면 사이사이 자유롭게
피어버린 들꽃이 보인다

믿을 사람 하나 없는 나에게는
좋디 좋은 수다꾼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보면
마침표가 찍혀버린 기차역에
도착한다

나는 선선한 저녁바람을 맞으며
이제 막 피어버린 들꽃 마냥
걷는다

 


<중등부 산문부문 장원>

들꽃

- 최서영(인천해원중학교 2학년)

하늘하늘 땅에 코가 콕 박히게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연보라색 나는 하늘색 꽃.
“서영아!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니에요.”
엄마는 내가 이상했나보다. 대구로 할머니 성묘를 온 게 이번이 네 번째이다.
‘아,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4년이 넘었구나!’
점심을 드시고 나면 언제나 할머니는 “서영아, 놀러 가자” 하시며 나를 데리고 나가셨다. 그러면 신나서 할머니 손을 잡고 따라 나갔다. 내가 신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와 노는 것보다 할머니가 사주시는 과자였다. 아토피가 너무 심한 내게 과자나 인스턴트 음식은 절대 먹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먹을 수 없으니 그게 얼마나 더 먹고 싶던지……. 그런 내가 늘 안쓰러우셨는지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나와서 군것질거리를 사주셨다. 난 과자를 먹으며 할머니 손을 잡고 산책을 했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나를 보고 혼잣말도 아닌, 대화도 아닌 이야기를 언제나 길게 그렇게 하셨다. 길에 피어 있는 꽃이며 먹을 수 있는 나물이며 이것저것 내게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런 할머니가 치매로 나도 못 알아보시고 자꾸만 못 알아듣는 말씀만 하셔서 울기도 하고, 화도 냈다.
“할머니 자꾸 왜 그래?”
“나 서영이잖아. 속상하게 자꾸 그래.”
이후에도 할머니 혼자 몰래 짐을 나가신 적도 서너 번, 주방에 불을 켜놓아서 불이 날 뻔한 적도 몇 번, 나중에는 우리 식구들 아무도 몰라보게 되었다. 결국 요양원에 들어가셔서 일주일에 한 번 할머니를 뵈러 갔는데 식사가 나와도 엄마를 보시고 가만히 계셨다. 숟가락질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엄마가 아기처럼 할머니께 밥을 먹여 주시는데 너무 속이 상했다.
“엄마. 할머니는 모르는 나물도 없고 모르는 꽃 이름도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바보가 됐어?” 그러니까 엄마가 한참동안 나를 쳐다보시다가 “응, 할머니가 그동안 너무 똑똑하게 살아오셔서 이제부터는 쉬시는 거야” 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가장 예쁜 친구였다. 할머니도 내게 가장 천사 같은 친구였다.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났다. 과자를 한 보따리 사주시고는 “빨리 먹어라. 엄마 알면 혼난데이. 다 못 먹으면 버맀부라.”
그러시고는 조리퐁만 들고 집에 오셔서는 엄마에게 “조리퐁은 괘않타. 우유에 말아먹으면 안 가렵다” 하시면서 집에서 먹을 간식까지 만들어주셨다. 그럼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내게 우유에 말은 조리퐁을 주셨다.
어느 날은 산책을 하다 불편한 다리를 쪼그려 앉으시고는 나를 보고 “서영아. 이것 봐래, 억시 이쁘제. 이게 꽃마리다. 서영이만치 이쁜 꽃마리가 보얗다. 보얗게 폈네.”
잘 들여다봐야 보이는 아주 작은 꽃이 예쁘다고 나를 닮았다고 하시니 “난 이 꽃 안 이뻐 할머니” 했다. “와? 얼마나 이쁘노. 하늘하늘한기 날아가게 이쁘다” 하시며 한동안 꽃을 보고 계시던 할머니가 잊히지 않고 그대로 생각이 난다. 그렇게 하늘하늘 날아갈 것 같은 꽃마리가 할머니 산소에 피어 있다. 보얗게…….

 


<고등부 시부문 장원>

그늘

- 김대연(고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삽다리 우체국은
그늘이 많은 자리였다
선생님은 이름 때문이라고 했다

학교 옥상을 타고
내게로 다가온 햇살이
눈꺼풀을 짓누르다 사라지면
나는 손끝부터 퍼진 잉크를 보았다
꼭 여러 겹의 그늘이 겹쳐진 자리 같았다
그 자리 아래에서
마지막을 담지 못한 편지가 숨 쉬고 있었다

66번 버스는 삽다리 우체국을
끝까지 발음하지 않았다
턱을 넘을 때마다
버스가 재채기를 했고
편지 봉투의 글씨들이
선명하게 나를 당겼다

들판 속 우체국,
선명한 글씨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곳
낯선 사람들의 마음이
소포 속에 담겨있었다
나는 마지막을 담은 채
도착했으면 하는 곳으로
따뜻한 글씨들을 날려 보냈다
마르지 않은 숨결 위로
도장이 찍혔다 어딘가로
날아가 수 있다는 듯이

바람의 그늘이 짙어졌다
소포를 엮은 줄이 얇아져도
불평할 사람은 없었다
스쳐가는 참새처럼
잔잔해서 따가웠다
다녀가는 숨들이 적어지는 우체국은
삽다리의 이름을 따르는 중인건지

들에 짙은 어둠이 졌다

나는 멈춘 그늘에 숨을 불어넣었다
마르지 않은 잉크에서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등부 산문부문 장원>

물(水)

- 이다연(이현고등학교 3학년)

<천년횟집>의 간판이 내려졌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왔던 가업이었다, 사십 년 전통이라고 써 붙였던 플래카드가 힘없이 나부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고기를 들여오던 트럭은 더 이상 가게를 방문하지 않았다. 가게 문을 닫던 날, 어머니는 문을 닫아걸고 남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였다. 순식간에 수조가 비었다. 이따금 호스가 물을 공급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끓어오르는 붉은 거품들 사이로 생선 반 토막이 떠올랐다. 생선살을 발라내던 아버지의 젓가락이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아버지가 수조에 담겼던 물을 비워내고 수돗물을 받고 있었다. “또 시작이야!”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가게가 망하고 나서도 아버지는 끊임없이 수조에 물을 채웠다. 당장이라도 손님이 몰려들 것처럼 바가지로 물을 퍼서 부지런히 가게 앞을 청소하고, 호스가 연결된 수도꼭지를 틀었다. 켜진 텔레비전 속에서는 오래된 지역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몇 년 전 작은 방송사에서 아버지의 가게를 취재했었던 내용이었다. 화면 속의 아버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날렵한 손으로 도미의 배를 가르고 뼈를 발라내는 장면이 클로즈업되었다. 도마 위에서 펄떡이던 지느러미가 힘없이 늘어졌다. 나는 텔레비전을 껐다. 교복에서는 더 이상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숙제를 하려던 나를 어머니가 불러 세웠다.
“가게가 팔렸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곁눈질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여전히 수조 안에는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상처로 가득한 아버지의 손이 물에 젖어 반들반들했다. 나는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등 뒤에 울렸다.

아버지는 마지막 날까지 수조의 물을 갈았다. 냉장고와 소파 따위가 트럭 위에 실려 있었다. 트럭 운전사가 아버지를 재촉하였다. “거, 빨리빨리 좀 하쇼!” 가게의 간판은 벌써 <하나로안경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덜덜거리며 물을 쏟아내던 호스가 멈췄다.
트럭에 수조가 실렸다. 수조에는 물이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쩌면 수조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남은오아시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선 찌꺼기를 모으던 자리에 선인장들이 놓이고 있었다.

 


<어머니부 시부문 장원>

울타리

- 신하열(인천 부평구 삼산1동)

살 나간 양산 속으로 어금니 꽉 깨문 어미가 어깨를 들썩인다
황망한 마음으로 달려와 이내 돌아서야 하는 어미의 미간 사이를 짠내 먹은 바람이 채우고
이제는 굽은 허리에 시간을 짊어진 아비가 꼬부라진 손가락을 내밀어 보지만
곤두박질치는 마음을 붙잡지 못한 어미는 성숙하지 못한 마음으로 울타리를 만든다
물 먹은 달이 들락날락하는 초파일 밤
토방 끝에 앉은 어미는 아들만 기다리고
망자보다 더 서운할리 없는 이승에서의 설움을 아비는 고기 그물에 대신 새겨 깁는다

 


<어머니부 산문부문 장원>

울타리

- 최미자(인천 서구 연희동)

“경화야!”
탱자나무 사이로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경화야! 지금 집에 누구누구 있냐?”
“나랑 언니랑 그리고 할머니, 아니다. 할머니는 좀 전에 옆집 작은할머니 댁에 가셨는데, 엄마 왜 그래?”
엄마는 탱자나무 사이 움푹 들어간, 우리들이 개구멍이라 부르는 곳에 상자 하나를 들이밀고 계셨다.
“얼른 와서 이것 좀 잡아당겨라.”
엄마는 좁은 구멍으로 책가방보다도 큰 종이상자를 밀어넣고 계셨다.
“할머니는 안 계시지?”
엄마는 나쁜 짓 하는 학생처럼 할머니의 부재를 확인하셨다.
“근데, 이게 뭐예요?”
“별것 아니야. 전기 후라이팬이야.”라며 엄마는 내가 100점 맞았을 때처럼 양 볼이 붉어지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대가족 종부로 시집오신 엄마는 1년이면 10번도 넘는 제사에 편한 날이 하루도 없으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 고모 그리고 석산일 하시는 일꾼들까지 합하면 매끼마다 20명 정도가 식사를 하였다. 80kg 쌀 한 가마니가 사흘도 못되어 바닥이 나던 때였다. 아침 먹고 돌아서면 점심 준비하고 짬짬이 샛거리(간식) 준비해서 일꾼들 챙기고 저녁을 지으시던 엄마는 수건 쓴 머리와 칙칙한 몸빼(일) 바지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행주치마를 입고계신 모습으로 매일매일을 사셨다.
분주하고 바쁘지만 활기찬 엄마는 언제나 밝고 명랑하셨는데 아마도 쉴 틈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리 보였던 것 같다. 더구나 제사일이 다가오면 엄마는 거의 신의 경지에 오르셨는데 20여 명의 식사 준비는 물론 제사 준비도 완벽하게 해내셨다. 특히 제사상에 오를 부침 준비에 있어 엄마는 거의 마술사의 손놀림처럼 색색이 모양을 내셨는데 함께 하시는 작은 엄마나 당숙모들은 그런 엄마의 솜씨에 감탄하시곤 하셨다.
엄마는 전기 프라이팬을 보물단지 모시듯 우리 앞에 펴 보이시며 지금 프라이팬보다 3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와 석유곤로 위에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서 전을 부치지 않고 방안에 앉아 편하게 부침을 할 수 있는 전기 프라이팬을 우리들에게 자랑하셨다. 오랫동안 갖고 싶었다는 프라이팬을 투박한 손으로 이리저리 만지며 할머니가 멀쩡한 프라이팬을 두고 비싼데 굳이 살 필요 있느냐고 싫은 내색만 하셔서 망설였었다고 하셨다. 언니들과 나는 어차피 들통 날 일인데 굳이 탱자나무 사이로 비밀스레 집에 들여오신 엄마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할머니 몰래 전기 프라이팬을 집안에 들여오신 일에 만족하시며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시골집은 탱자나무 울타리가 온 집을 감싸고 있었다. 강아지가 구멍을 내서 집을 나가고 들어왔고 우리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탱자나무 위로 엄마께 가방을 넘겨주고 친구들과 놀러 다녔다. 남동생들은 탱자나무를 사이에 두고 칼싸움과 총싸움을 하면서 가끔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엉엉 울기도 하였다. 엄마는 무거운 장바구니나 짐들을 개구멍 사이에 집어넣고 빈손으로 대문으로 들어오셔서 물건들을 부엌으로 가져가시곤 하셨다.
작고 예쁜 새싹이 돋고 앙증맞은 하얀 꽃을 피우던 탱자나무에 초록빛 열매가 달리면 우리 집은 동화 속에 나오는 요새가 되곤 하였다. 열매들이 동글동글 탱글탱글 굵어져가는 동안 우리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노래도 부르고 숙제도 하였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탱자를 따라가 인형놀이와 공기놀이를 하였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가위바위보를 하여 한입씩 깨물어보기도 하였는데 그 맛은 쓰고 시고 텁텁하고 정말 맛이 없어서 퉷퉷퉷 침을 뱉곤 하였다.
감나무에 감이 익어가고 밤송이가 벌어져 밤톨들이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떨어질 때쯤이면 노오랗게 익은 탱자를 따 모아 할머니는 방마다 대바구니 가득 담아두셨다. 겨울 동안 새콤달콤 향기 가득한 방을 위해서였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으셨던 엄마께 탱자나무 울타리는 비밀스러운 물건을 사들이고 이웃집 아주머니들과 담소를 나누시던 곳이었다. 힘든 하루 중 잠깐 짬을 내시어 이웃과 음식을 나누어 드시고 아이들 커가는 이야기를 나누시고 시부모 험담도 늘어놓으셨던 탱자나무 울타리가 엄마께는 아늑한 카페처럼 달콤한 휴식처가 되곤 하였다.
이제 팔순을 맞이하시는 엄마께 지나온 세월보다 더 향기로운 탱자나무 한 바구니 선물해드리고 싶다. 엄마의 청춘과 젊음이 가득했던 옛집 탱자나무 울타리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텃밭을 일구어 사계절 먹을거리를 준비하시는 엄마는 옛날에 그러셨듯 여름방학 때와 명절 때 내려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한 손 가득 텃밭에서 거두신 방울토마토와 오이, 고추, 가지 등 갖가지 보물들을 쥐어 주신다.
젊어서는 너무나도 바쁘고 경황없는 날들을 사시느라 엄마 하고 싶은 일 어느 것 하나 해보지 못하셨는데 팔십 되신 엄마는 젊으셨을 때보다 더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다. 병원 봉사활동과 요가, 노래교실 그리고 마을회관 점심 봉사와 청소까지 해내시며 일주일에 하루 문학관에 다니시며 시를 낭독하시고 글쓰기를 배우신다.
지난겨울에는 엄마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는 회고록을 내셨다. 자랑스러운 엄마의 하루하루는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는 꿈을 이루는 도전의 시간이고 희망이다. 구십이 되어도 백세가 되어도 변함없이 지금의 모습처럼 지내시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