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2021년) 새얼전국학생·학부모 백일장 장원작품 - 산문

  • 날짜
    2021-07-16 13: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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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새얼백일장 장원 작품

 

<초등3·4학년부> 산문 장원

내가 모은 것

김지효(인천연성초등학교 4학년)

 

나는 컴퓨터를 배우고 싶어 1학년 3분기부터 방과 후 컴퓨터 수업을 신청했다. 방과 후 컴퓨터 수업에서는 돈 대신에 물건을 살 수 있는 비트라는 것을 사용했다. ‘비트랑 바꿀 수 있는 물건은 계속 바뀌었지만 미니 공책, 별사탕 등을 얻기 위해 열심히 비트를 모았다. 발표를 잘 하면 5비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타자 연습을 열심히 하는 친구 중 몇 명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랜덤으로 뽑아서 비트를 받았다. 또 가끔씩 하는 복권 행사에서 최대 40비트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선생님이 복권 종이를 나눠주셨는데, 운 좋게도 40비트가 나왔다.

내 친구들 중에서 나만 40비트를 받아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방과 후 컴퓨터 수업이 있는 수요일은 결석하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200비트를 모았다. 그땐 너무 기분이 좋아서 쫀득이도 사고 머리끈도 샀다. 그런데 타자연습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쉬웠는데, 나중에는 3분에 220타까지 쳐야 해서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비트를 받기 위해 다른 친구들보다 더 일찍 컴퓨터실에 가서 연습했다. 그런데 220타는 넘었지만 정확도가 95% 보다 1% 부족한 94%였다. ‘정확도가 1%만 더 있었더라면이라고 엄청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비트를 받지 못해서 속상하다고 말씀드렸더니 감사하게도 1비트를 나에게 주셨다. 그래서 나는 감사의 뜻으로 주머니에 있는 작은 사탕을 선생님께 드렸다.

한글 타자 연습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정규수업을 했다. 정규 수업 시간에는 엑셀, 엔트리 코딩, 그림판 사용법, 파워포인트 앱을 쓰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하루는 파워포인트 앱으로 얼굴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단발머리에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눈썹, 갸름한 얼굴을 완성했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자유 시간을 가졌다. 나는 내 친구와 비트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이 어떤 게 있는지 구경했다. 거기에는 아주 작은 공책, 미니 레고, 작은 별사탕이 있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토끼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아주 작은 공책을 샀다.

그 다음주, 컴퓨터실에 와보니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만든 작품이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지난 시간에 만든 나만의 방 꾸미기 작품이 걸려있었다. 타자 연습 시간이 시작되고 우리는 다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트를 받기에는 속도와 정확성이 부족했다. 선생님이 너무 어려우면 영어 낱말 타자 연습부터 해도 돼.”라고 하셔서 영어 낱말 타자 연습을 시작했다. 한글 타자 연습의 어려운 단계를 하다가 영어 타자 연습의 쉬운 단계를 하니 쉽게 비트를 받을 수 있었다. 컴퓨터를 배우면서 비트를 모으는 재미로 2학년 3분기까지 방과 후 컴퓨터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3학년 1분기는 방과 후 컴퓨터 수업뿐만 아니라 어떤 방과후 수업도 신청할 수 없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등교 수업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방과 후 선생님이 그만두셨다. 선생님이 그만둔 것도 속상하지만 내가 애써 모은 쓰지 못한 비트만 100비트가 넘어 더욱 안타까웠다. 소중히 모은 비트가 더 이상 쓸모없어졌다. 아끼지 말고 바로바로 쓸 걸 그랬다. 아니면 친한 친구에게 나눠주거나 할 걸 코로나 바이러스 정말 밉다. 요즘에 나의 소중했던 비트는 분주한 책가방이 아닌 조용한 책상 서랍 구석에 있다. 빨리 코로나 바이러스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선생님도 돌아오실 수 있고, 재미있는 컴퓨터 수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모은 비트를 다시 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다.

 

<초등5·6학년부> 산문 장원

유령

천세현(인천해원초등학교 6학년)

 

평생 남는다는 졸업앨범 사진을 찍는 날이 다가왔다. 며칠 동안 친구들의 모든 관심사는 어떤 옷을 입을지, 머리는 어떻게 하고 올 것인가였다. 나 역시 거울을 보며 어떤 표정으로 사진을 찍을지 연구했다. 졸업사진을 찍는 날, 아침 일찍부터 애써 만진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하여 학교로 왔다. 친한 친구들은 이미 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 중 한 명이 마스크 너머로 잔뜩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마스크 벗고 얼굴 공개하려나? , 제발 애들 앞에서만은 찍지 않게 해주세요. 그치?”

친구의 목소리가 작은 건지, 마스크 때문인지 잘 들리지 않아 다시 물었다.

뭐라고? 잘 안 들려.”

친구는 내가 자신의 의견에 바로 맞장구쳐주고 위로해줄 거라 생각했는지 샐쭉하게, “마스크 벗고 찍어서 싫다고 했어!”라고 외친 뒤 저만치 앞으로 뛰어갔다. 앞서가는 친구를 따라 나도 덩달아 강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선생님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아이들을 부르시더니 차례가 되면 마스크를 벗고 찍은 뒤엔 바로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하셨다.

1번부터 순서대로 초록색 크로마키 앞으로 갔다. 친구의 바람이 무색하게 사진 촬영을 하는 위치는 반 친구들이 모두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내 뒤에서 기다리던 친구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웅얼 거리는 것이 얼핏 들렸다. 왠지 나는 그 칭얼거림을 듣고 싶지 않아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 쪽에서는 우리 반 아이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으로는 그 애가 우리 반인 걸 알면서도 누군지 기억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결국 한참을 살펴본 후에야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단지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 쟤가 걔였어?”, “지금 찍고 있는 앤 누구야?”라며 속삭이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아이들 사이에서 일종의 새로운 놀이가 생겨났다. 지금 찍고 있는 아이가 누군지 맞추는 것이었다. 그런 놀이를 한다는 것이 새로우면서도 허무했다. 나와 친하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조차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한 학기를 같이 보내면서도 서로의 진짜 얼굴을 몰랐다는 것이 내 마음을 차갑게 할퀴고 지나갔다.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아이들의 얼굴은 가짜 얼굴이었을까. 마스크로 가린 부분을 제멋대로 상상하며 그 애의 얼굴을 만들어 나갔을 것이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마치 유령 같았다.

한 학기 동안 만났던 친구들이지만 서로의 얼굴을 알지도, 보지도 못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유령 같은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백지처럼 하얀 마스크를 낀 유령 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우리를 유령으로 만든 이 마스크가 너무나도 싫었다. 유령과 함께 한 졸업사진이었다.

 

<중등부> 산문 장원

곰팡이

정하늘(인천부일여자중학교 3학년)

 

나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나는 겉으로만 보면 너무 밝고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다. 나도 내가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사춘기를 지내고 있는 요즘 나는 내가 너무 궁금해서 자주 들여다보곤 하는데 얼마 전 내 마음속 구석에 피어오른 곰팡이를 보았다. 나도 나를 잘 몰라서 나는 항상 밝고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하고 맑은 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 마음 가장 깊은 구석에는 언제부턴가 거무튀튀한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 나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곰팡이를 빨리 없애려 애를 썼다. 좋아하는 노래도 들어보고 영화도 보고 일부러 웃어도 보고 곰팡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도록 열심히 바쁘게 살아보기도 했지만, 내 마음속 곰팡이는 점점 더 크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고 다시 들여다 본 내 마음속에는 어느새 곰팡이가 내 마음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곰팡이는 내가 우울할 때마다 점점 더 크게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알아챘다. 이 곰팡이는 나의 사춘기와 한 패라는 사실을.

요즘 나는 사춘기를 거쳐 가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이, 내가 무슨 사춘기야. 말도 안 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내가 사춘기 소녀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너무 행복하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지고, 감수성이 풍부해져 쉽게 눈물이 터지기 일쑤였고, 부모님께 말 한 마디를 꺼낼 때도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날카로운 말이 나와 상처를 드리기 일쑤였다. 이렇게 사춘기를 하루하루 거쳐 갈 때마다 내 마음속에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곰팡이가, 사춘기가 나쁜 것이고 티가 나서는 안 되는 것이고, 조용히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내 마음속에 곰팡이를 없애려고만 했다. 그런데 그때 나에게 정말 큰 힘이 되어주는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있잖아, 나 요즘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이 사춘기는 내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성장하는데 느끼는 성장통이 아닐까 싶어.”

이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나의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다.

친구야, 사실 나도 요즘 내가 사춘기라는 것이 너무 잘 느껴져서 슬퍼. 쉽게 우울해지고, 그럴 때마다 너무 혼란스러워, 어떻게 해야 이 사춘기를 빨리 넘어갈 수 있을까?”

나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말했다.

사춘기를 왜 빨리 넘기려고 해? 사춘기는 잘못된 게 아니야. 사춘기는 우리가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성장 과정이야, 너 키 클 때 성장통이 느껴지면 어때? 아프지만 키 크니까 기분 좋지? 그것처럼 이 사춘기도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성장통일 뿐이야. 너무 당연한 과정이니까, 그걸 인정하고 나랑 같이 이 시기를 잘 극복해보자.”

이 말을 듣고 나는 나의 곰팡이를 누군가가 꽉 껴안아준 기분이었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난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을 겪고 있구나.’ 하면서 안도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의 사춘기를 인정하자 내 마음속에 피어있던 그저 지저분한 곰팡이는 이로운 푸른 곰팡이로 바뀌었다. 생명을 살리는 푸른 곰팡이처럼 내 마음속 곰팡이도 내가 나의 사춘기로 인해 너무 많이 아파하지 않도록 치료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저 이상하게 느껴졌던 곰팡이의 냄새도 더 이상 이상한 냄새가 아닌 싱그럽게 자라나는 나무의 향기로 변해 나의 성장 정도를 알려주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이 곰팡이를 없애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끔씩 곰팡이의 향기를 맡으며 내가 좋은 어른으로 한걸음씩 내딛으며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위로도 받고 나중에 사춘기 시기가 지나고 좋은 어른으로 성장한 후에 그땐 그랬지하며 지금 이 시기의 감정을 떠올리고 추억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친구들은 지금 나의 마음속 곰팡이는 어떤 상태인지 바르고 올곧은 방향으로 피어나며 싱그러운 성장의 향기를 내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어른들은 나의 사춘기 시절은 어땠는지, 그때 그 시절에 새겨진 자신 안의 곰팡이 자국을 더듬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사춘기 친구들 모두 지금의 곰팡이에 너무 많이 아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사춘기라는 곰팡이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할 때마다 ! 지금 내가 한 단계 또 성장해구나, 성장하며 느끼는 성장통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무사히 내 안에 곰팡이를 이로운 곰팡이로 만들어가길 바란다.

 

<고등부> 산문 장원

스며들다

전지현(서울선유고등학교 2학년)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날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한 회색빛이었고, 날씨는 그럭저럭 쌀쌀했다. 나는 책상에 앉아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며 볼펜을 끼적이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는 그런 날 불쑥 방문을 두드리며 찾아온다. 나의 경우에는, 할머니 댁에 살던 강아지 소식이었다.

그 애가 죽었단다. 난 그 소식에 그리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래? 동생한테는 입 조심해야겠네. 딱 그 정도의 감각. 예전에는 그 애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컥이며 떨렸는데, 생각보다 그리 슬프지 않았다. 그냥 기분이 조금 이상했을 뿐이었다. 왜 슬퍼하지 않지? 오히려 그게 더 찝찝했다. 거의 한평생을 같이 지냈는데, 조금쯤은 슬퍼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남들은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나면 그렇게 슬피 운다던데, 가는 길 외롭지 않게 눈물 몇 방울은 떨어트려 줘야 하지 않나? 그때의 나는 그냥 생각보다 내가 그 애를 아끼지 않았나보다, 하고 넘겼다. 마지막 모습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무거운 혹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모습이었으니, 차라리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그 애한테도 더 나을지도 모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찾아갈걸. 괜히 후회스러운 생각이 들다가, 이내 그대로 흘러갔다. 자잘한 감정까지 끌어안고 골몰하기에는 쌓여 있는 공부거리가 너무 많았다. 끄적끄적, 잠시 멈췄던 볼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쩌면 난 그저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뿐이었는지 모른다. 일상에 스며든 부재란 모순적이게도 인지하기 어렵다. 그냥 당연히 거기 있을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해버리는 탓이다. 밥을 먹다가 밥풀이라도 흘리면 재빨리 줍다가, 아차. 당장이라도 달려올 그 애가 없으니 이제는 그리 급하게 굴지 않아도 되는데. 그건 나를 굉장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주 당연한 명제가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나를 구성하던 세계가 무너진 듯한 기분이 둥둥 떠다녔다.

그 이후로도 나는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곳에서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돼지갈비를 구워먹고선 살점이 넉넉히 붙은 갈빗대를 챙기려다가 아차. 화장실에 들어갈 때도 그 애가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까 조심조심 발을 딛다가 아차. 그럴 때마다 마음에 한기가 스미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애가 없는 집안이 너무나 휑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느낌이 답답하게 가슴을 맴돌았다.

솔직히 난 그 애가 나와 한평생 같이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걸 알았음에도 조금 더 곁에 있었으면 했다. 그냥, 할머니 댁에 가면 늘 있는 익숙한 존재니까. 그 애는 이미 내 일상에 완벽하게 녹아 들어있었다. 그 애가 없는 기억들이 있는 기억보다 많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난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탄했다. 그 애가 마지막이었는데. 우리 집은 유달리 반려동물과 맞질 않아서, 새로운 아이를 들여올 만한 여건이 안 되었다. 그나마 곁에 있었던 것은 그 애정도. 길거리에서 떠돌던 그 애는 어느 순간 집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비켜주질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지. 우리 집안의 마지막 강아지가 될 운명 말이다. 그 애의 빈자리를 달래줄 새로운 아이가 들어올 수도 없으니, 사용하던 물건만 남기고 영원히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겠지. 차마 메꿀 수 없는 빈자리를 남겨두고 그렇게 영영.

난 아직도 슬프지 않다. 그렇게 충격적이지도 않다. 다만 그 애가 남기고 간 여운이 너무나 길어서 종종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그 갈색 털과 따뜻한 체온과 검고 동그란 눈망울에 막연한 그리움이 남았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다. 날 기억하냐고. 이제는 두 눈이 보이고 두 귀가 들리냐고. 아프지 않고, 잘 뛰어다닐 수 있냐고.

그 애를 다시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그냥, 그뿐이었다.

 

<학부모부> 산문 장원

마중

김선미(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인도 최대 명절인 홀리가 지나자 이곳의 모든 것이 암흑 속에 갇혀 버렸다. 인도에 주재한 한국의 회사는 일제히 봉쇄되었고 교민 사회 역시 갈 길을 잃은 듯 갈팡질팡하였다. 코로나 펜데믹. 남편을 따라 인도에 온 지 5년만의 일이었다. ‘I can’t move.’ 오랫동안 집안일을 봐주던 네팔 출신 메이드는 이 짧은 문자를 남긴 채 행방을 감추었다. 봉쇄령 때문에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인지 아파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한인 교민회가 초대한 채팅방은 서로의 안부와 인도의 코로나 상황을 알리며 정신없이 울려댔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채팅방만 보고 있자니 나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거기에 덧붙여 한국에서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는 인도의 상황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인도의 의료체계가 무너지고 식량과 산소통이 약탈되고 있으며 이들이 신성시하는 갠지스 강에는 시체가 떠다닌다는 소식을 전하며 어머니는 오열하셨다. 나는 어머니께 내가 사는 이곳은 잘 정돈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가 사는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지옥, 그 자체였다. 아파트 건너편에는 빈곤층이 판자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한 가구에 여러 명이 웅크린 채 혹독한 시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판자촌 한 편에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먹을 것을 찾아 마을을 빠져나온 사람들을 경찰이 무참히 짓밟는 소리였다. 무력으로 그들을 묶어두려고 한다지만, 나는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인간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무엇이 막을 수 있겠는가. 집 안에서만 격리된 지 두 달 째 되던 어느 날이었다.

여보, 우리 살았어! 살았다고!”

침몰하는 여객선에서 구명조끼를 얻은 것 마냥 우리는 기쁨을 주체 못하고 얼싸안았다. 한국에서 교민을 위한 네 번째 특별기가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였기에 출국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출국 당일, 남편과 나는 아이 둘과 캐리어 하나만을 챙겼다. 인도에서 5년을 살았지만 매우 단출한 짐이었다. 나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목숨만 구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꼭 이곳을 빠져나가리라.

비행기 출국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만약을 위해 우리는 새벽에 집을 나섰다. 해가 뜨기 전 뉴델리는 을씨년스러웠다. 차 창 밖으로 시퍼런 풍광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었다. 마스크를 쓰지도 않은 채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창문을 두드렸다. 배가 고픈지 여자는 연신 먹을 것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연락이 두절된 메이드 생각에 무엇이든 건네고 싶었지만 차마 창문을 열 수 없어 건너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장에서 퇴각하는 군인마냥 남편은 속도를 높여 차를 거칠게 몰았다. 잘 포장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지만 차는 유난히 덜컹거렸다.

뉴델리 공항은 떠나려는 자와 그들을 쫓으며 구걸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출입문에는 긴 총을 어깨에 맨 공항 경찰이 사천왕 같은 무서운 얼굴로 서 있었다. 우리는 여권과 항공권을 그들에게 보여주었고 무엇을 심판하기라도 하듯 그들은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몇 초의 찰나가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들은 빗장을 풀 듯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유리문 밖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남루한 차림의 인도 사람들이 보였다. 문득 투명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생과 사가 나위어진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폭동이 일어나 유리벽을 깨고 그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은 불안감과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미안함이 어지럽게 공존하며 나를 괴롭혔다.

마지막 게이트를 남겨두고 품에 안겨 있던 둘째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게이트로 가는 길이 이토록 멀고 아슬아슬했던가. 나는 둘째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함께 비행기를 탈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드디어 게이트가 열리고 태극무늬가 새겨진 비행기가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뿌연 안개 속에서 아침 햇살을 받은 비행기는 쨍한 빛을 내며 우리를 맞아주는 듯했다. 누군가는 숨죽여 울었고, 다른 누군가는 환호를 지르며 만세를 불렀다. 이보다 더 반갑고 가슴 벅찬 마중이 또 있을까? 나는 다리가 풀린 나머지 남편에게 살며시 기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