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한반도의 단전(丹田)이며 인구 3백만의 대도시입니다. 인천의 시작은 비록 어려웠지만 희망의 도시로 출발했고, 지금은 평화와 통일의 도시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구한말 개항 무렵, 건강과 꿈을 밑천으로 일자리를 찾아 맨몸으로 인천에 모여들면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천에서 옥고(獄苦)를 치르며 건설한 인천항만을 통해 국내외 여러 나라 선박들이 오가는 그곳에서 일터를 찾고 ‘해불양수(海不讓水)’라는
공동체 의식을 만들어냈고, 함께 도우며 자식을 키우고 교육시키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살았습니다.
인천항은 나라를 잃은 백성의 땀과 고통, 그리고 한숨이 배어있고, 민족의 분노와 열기가 서려 있는 곳입니다. 해방 후 갑작스럽게 외세에 의한 분단이 찾아왔을 때, 이북5도민들이 문전옥답
(門前沃畓)을 두고 쫓기듯 내려와 정착한 곳이 인천이었습니다. 6·25전쟁 이후 근대화와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 근로자들이 남동공단과 주안공단으로 모여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여 일가를
이룬 곳도 바로 인천입니다.
6·25전쟁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150만 명의 사망자와 300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나라 안의 공장, 발전소 등 모든 시설이 초토화되어 국민이 기아(飢餓)에서 허덕일 때, 평화통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절망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준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 1899 ~ 1959) 선생과 최초의 민중혁명이었던 1960년 4·19학생민주의거로 내각 수반이 된 운석 장면(雲石 張勉, 1899
~ 1966) 선생도 인천 출신이었습니다.
문화 쪽으로는 우리나라 고미술학의 태두인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 ~ 1944) 선생, 한국수송산업의 거목이었던 정석 조중훈(靜石 趙重勳, 1920 ~ 2002) 선생, 또한 맹인들의
세종대왕 박두성(松庵 朴斗星, 1888 ~ 1963), 근대조각의 기초를 닦은 조규봉(曺圭奉, 1917 ~ 1997), 판결문을 한글화한 대법원장 조진만(趙鎭滿, 1903 ∼ 1979), 서예가 검여 유희강
(劍如 柳熙綱, 1911 ~ 1976), 동정 박세림 선생(東庭 朴世霖, 1924 ~ 1975), 항공우주분야의 장극(張勀, 1913 ~ 2008), 경제학자이자 서울대학교 초대총장이었던 신태환(申泰煥, 1912
~ 1993),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 함장 신순성(愼順晟, 1878 ~ 1944), 우리나라 최초로 시립박물관을 열었던 석남 이경성(石南 李慶成, 1919 ~ 2009) 선생 등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교육·법률·예술의 초석을 놓은 인물들이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곳도 인천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반세기 전인 1975년 10월 23일, 새얼문화재단이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귀해지기 위한 노력의 출발이었습니다. 사람이 귀해지고, 지역이 귀해지는
것은 정치만의 일도 아니고, 법률로 제정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볕과 바람을 막아주고 때에 따라 물을 뿌려주는
것은 주위에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잘 되고, 홀로 잘 살며, 혼자만 귀해지지 않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견여탄(肩輿歎)>이란 시에서 “人知坐輿樂 不識肩輿苦(사람들이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르고 있네)”라 했지만, 새얼문화재단은 지역사회의
번영과 우리의 미래와 평화를 위해 오늘도 기꺼이 그 수고를 이겨낼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새얼문화재단이 움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