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100년 전 오늘을 생각한다

  • 날짜
    2005-07-29 09: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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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오늘을 생각한다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조선왕조 외교사에서 승려 이동인(李東仁)이 밀사로 활약하는 것을 시작으로 밀서 왕래가 국제간에 잦은 것을 볼 수 있다.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고종에게 바친 <조선책략>을 그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중국과 친하고(親中國) 일본과 결합하며(結日本) 미국과 연결해야(聯美國) 하고 중국의 지휘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과 연결하는 것은 미국이 조선영토에 야욕이 없고 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먼저 미국과 공평한 조약을 체결하여 다른 서양국가들과 맺을 조약의 원형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중국의 주장이 동진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아보자는 책략으로써 일본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유림에서는 만인소를 올려 친중국은 당연한 논리이고 연미국은 거리가 멀어 불가능하고 결일본은 망국적인 발상이라고 반대하다가 홍재학과 같은 사람은 처형까지 당한다.


많은 사람들은 <조선책략>을 주일중국대사 서기 황준헌(黃遵憲)의 작품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가 모시고 있던 하여장(何如璋)의 구술로 집필된 것이다.


하여장은 “조선을 중국의 한 군현으로 삼는 것이 상책이고 감국대신(監國大臣)을 파견하는 것은 중책, 그리고 조약 체결을 권유하는 것은 하책”이라는 이른바 ‘삼책’을 이홍장에게 별도로 보고하고 있다. 여기서 조선책략이 얼마나 자국의 이익을 기초로 한 것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1882년 5월 22일 인천에서 이루어진 조선 최초의 불평등이 배제된 주권 독립국가 간의 국제 협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지만 자주외교의 일은 전부터 독립으로 행하였다”는 이홍장의 초안이 삭제될 때까지의 우여곡절은 너무나 처절하다. 더구나 한미 간의 국제적 협약 초안이 중국에서 작성됐다는 사실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더 나아가서 조선왕조가 끝나는 날까지 “조선책략”이 조선왕조 외교의 주류였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두 번째는 100년 전 오늘(1905년 7월 29일)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합의 각서가 서명됨으로써 당사자인 조선, 필리핀 사람도 모르게 강대국의 횡포가 자행된 날이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이 조선에 대해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 사실을 미리 확신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서둘러 태프트 육군장관을 동경으로 파견하여 조선을 찬탈하는 일본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를 만나 3일간의 비밀 회담을 통해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필리핀 지배권을 보장받는 대신 조선의 지배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으로 결정한다. 


이로써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1902.8.12)과 러일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1905.9.5)으로 열강의 승인하에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을 강압적으로 요구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회유와 협박으로 을사조약이 성립되는 비극을 맞는다.


같은 해 10월 고종황제는 선교사 헐버트를 특사로 임명하여 미국의 거중조정을 호소하는 친서를 가지고 워싱턴에 도착하지만 대통령은 고사하고 국무성 접근까지도 실패했다. 만일 미일의 가쓰라-태프트 비밀합의 각서를 미리 알았더라면 이런 국제적 망신은 없었으리라. 지금도 국제사회는 밀서, 각서, 친서 및 비밀회담이라는 이름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데 이것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혼과 열정을 다해 자각할 줄 아는 슬기가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대체 어느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을 벗어나 약소국을 생각한 일이 있었던가! 위의 두 사례를 보면 약육강식의 피비린내만이 이 나라에서 진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남북한 인구가 7천만이면 큰 나라가 아니냐고 확신한다. 그러나 한국의 반이 절박한 상태에 놓인 이상 우리의 국민소득은 만불이 아니고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라고 할 수도 없다. 통일은 당장 어렵다 하더라도 남북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국민적 합의와 방법이 절실한 것이다. 해방 60년과 가쓰라-태프트 비밀합의 각서 100년을 보내면서 이 나라 내일을 새롭게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인천일보 제5183호 5면 2005년 7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