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정화(鄭和) 그리고 그후

  • 날짜
    2006-08-16 09: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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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鄭和) 그리고 그후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지용택


2005년 7월 11일은 정화(鄭和 1371-1435) 함대가 600년 전 대양에 첫 배를 띄워 세계를 발견한 날이다. 중국 정부는 이 날을 공식기념일로 정하고 거국적인 기념행사를 치렀다. 콜럼버스보다 71년, 바스코 다가마 보다는 90년, 마젤란 보다는 100년 전에 세계를 항해한 위대한 개척자이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한 적이 없는 중국이 600년간 잠들어 있던 정화를 깨워 13억 중국 인민과 아울러 세계에 크게 알리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2008년 북경올림픽까지는 영화, 문화, 연구 업적으로 그 열기를 늦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새삼 수년 전 정화의 고향을 찾아 감회가 깊었던 일을 회상해 본다.

 

5년 전 새얼문화재단 역사기행단은 운남성 상춘(常春)이라고 일컬어지는 명승지 곤명시를 찾아보고 나서 버스 기사도, 안내원도 모르는 정화의 기념관이 있는 정화공원을 물어물어 찾아간 적이 있다. 가는 길은 멀고 지루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곤명은 골프 손님도, 관광객도 많은 데 이곳을 찾는 사람은 그 사이 없었냐고 안내원에게 물으니 수년간 관광 안내를 하면서도 이곳은 본인도 처음이란다. 곤명시를 벗어나 전지(滇池)를 바라보면서 비닐하우스와 논밭으로 연결된 평야를 60km 정도 달려가면 곤명시(昆明市) 진녕현(晉寧縣) 곤양진(昆陽鎭)에 있는 월산(月山)이 나온다.

 

한낮에도 조용한 시골동네, 한적한 시장거리와 연결된 월산은 작은 산등성이처럼 보인다. 이 동네가 세계를 발견한 정화의 고향이며 월산기념관이 있는 곳이라니 너무나 초라하다. 월산을 오르다보면 계단 오른쪽으로 정화의 석상이 곤양진 넓은 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힘은 있어 보여도 예술성이 찾아보기 어렵다.

 

 

정상에 오르면 찾는 이가 없는 기념관은 퇴색되어 문은 닫혀 있으나 비림은 돋보였다. 당대의 실력자 강택민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돌과 급조된 시멘트 비석에 중국이 세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음각했는데 하나같이 정화의 해양진출과 연계하면서 찬양하고 있다. 1405년 해양 원정을 떠나기 전 정화는 바다에서 고기밥이 되어 다시는 귀향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자기 처지를 염려하여 돌아가신 부모님의 무덤과 묘비를 양지바른 이곳에 모셨다.

 

이슬람 출신으로 명(明)과 원(元)의 싸움에서 어린 나이에 죄 없이 남성의 상징을 거세당하고 갖은 고생 끝에 환관 중에 수장인 태감이 되었으나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듣도 보도 못한 험난한 대양의 길로 들어서는 심경을 알 듯 하다. 조상의 묘는 알차게 마련하였지만 남경 중화문 밖, 우수산(牛首山)의 정화의 무덤에는 자신의 시신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를 비롯해서 정화를 기리는 사당이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해 “1492”라는 숫자를 인류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 넣게 했다. 그로부터 30년 후에는 마젤란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남아메리카 최남단 해협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이러한 해양 발견을 계기로 유럽은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방대한 시장과 원료를 한 손에 넣고 그때부터 세계사의 주도권을 유럽이 장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중국의 정화함대는 28년간 7차례에 걸쳐(1405-1433) 약 19만 km의 바닷길을 누비면서 30여 나라를 찾아갔다.

 

영국인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의 연구보고서에는 “정화 함대는 콜럼버스보다 71년 앞서 아메리카에 도달했고, 마젤란보다 백년 먼저 바닷길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남극해와 북극해를 탐사한 것을 보면 유럽인들 보다 300년 먼저 경도의 측정 문제를 해결했음이 틀림없다”고 한다.

정화 함대는 세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거대한 목조선이다. 함대의 중심에는 대형 함선 60척이고 이 함선을 보조하는 소선이 200여 척이나 되며 함대의 중심이 되는 거함은 보선(寶船)이라 하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151.8m이고, 폭은 61.6m나 된다. ‘대형 보선의 적재 중량은 약 2500톤이며 선단의 수는 300여 척이고, 승선 인원은 모두 2만 7천여 명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서양과 비교하면 정화 함대의 규모가 얼마나 방대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제1차 항해에서 참가한 인원이 함선 3척에 승무원 120명이며 기함 산타마리아호도 200~2500톤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 스페인 왕국은 비용 염출이 쉽지 않았다. 또 포르투갈 왕이 파견한 바스코 다가마의 함대는 함선 4척에 승무원 170명이며 기함 산가브리엘호는 120톤에 불과했다. 그리고 마젤란의 항해에 참가한 함선과 인원은 함선 5척과 승무원 265명이었다. 이것은 동서양의 경제규모가 대비되는 대목이다.

 

정화의 대양원정이 처음 시작한 곳이 복건성 정락현인데 그곳 남산에 있는 삼봉탑사(三峰塔寺) 천비궁(天妃宮)에 세워진 천비령응지기(天妃靈應之記)에 보면 이런 글이 보인다.

 

“나 정화는 영락 3년(1405)에 황제의 명을 받들어 동료들과 함께 이민족 나라들을 방문했다. 그 후 지금까지 모두 일곱 번 항해했는데 그때마다 수백 척의 대선단과 수만 명의 병사를 거느렸다. …… 수평선 너머 세상의 끝에 있는 나라들이 서쪽에서도 서쪽 맨 끝이 북쪽에서도 북쪽 맨 끝이 우리가 도달하려는 항해의 목표였다. …… 우리가 찾아간 서방 국가는 3천여 개국(여기서 3천개 국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해석에 이견이 있다)에 이르고 거대한 대양을 10만 리가 넘게 항해했다. ……”

 

이것은 정화가 일곱 차례 항해에 나설 때 해상의 안전을 주관하는 대신 천비(天妃)에게 그때까지의 항해에 대해 보고하며 가호에 감사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대양 개척에 대한 정화의 위대한 웅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화는 왕정에 변화가 오더라도 자신의 행적을 남기고 싶은 뜻이 스며있으리라 생각된다.

 


정화 함대는 전투, 탐험, 무역 등의 실제적인 목적을 추구한 함대로는 지극히 비효율적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정화 함대가 명나라의 위용을 천하만국에 과시하고 명나라에 조공을 요구하는 의례적인 목적으로 편성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정말 그랬을까?

 

2만 7천여 명의 중무장한 수군이 200여 척의 함정을 끌고 몰려 왔을 때 조공을 거부할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지금 다시 정화의 고향을 찾는다면 5년 전 초라한 월산이 아니라 아마도 장엄하게 확대 개축한 정화 공원이리라 생각된다. 중국이 이렇게 정화를 내세우는 이면에는 황해와 동남아시아 및 대양에 대한 중국의 또 다른 공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