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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0회 아침대화 - 이인호(명지대 석좌교수)

  • 날짜
    2006-04-12 12: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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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이인호(명지대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주제 : 역사읽기와 역사만들기
개최 : 2006년 4월 12일(수) 오전 7시
장소 : 인천 파라다이스호텔 대연회장
강사소개 : 서울대 문리대 중퇴, 미국 웰슬리대 역사학 석사, 미국 하바드대 역사학 박사, 고려대 교수, 서울대 교수, 주 핀란드 대사, 주 러시아 대사,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주요저서 : 『지식인과 역사인식』, 『러시아지성사 연구』

 


역사읽기와 역사 만들기


이인호(명지대 석좌교수)


I.역사는 오래 전부터 정치교육의 핵심부분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 이후 지난 10여 년 간처럼 역사 해석의 문제가 정치적 현안들과 직접 연결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학문의 분화가 시작된 19세기 이래 역사학은 시간을 축으로 하여 과거를 재구성하는 학문분야로서 발달해 오면서 한때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 가능한 목표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정치가 현재의 역사”라는 말 보다는 “현재의 정치가 과거의 역사”라는 말이 더 설득력을 갖는 상황이 되어 버린 듯 한 느낌이다.

 

이미 일어난 일로서의 역사와 역사가들이 재구성해 놓은 역사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괴리가 불가피하다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진실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단지 승자의 이야기일 뿐인가? 우리가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이며 역사읽기와 역사 만들기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역사가들은 미래에 대해 예측하는 것은 자기들의 몫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왜 우리와 중국 또는 일본 사이에는 역사해석을 둘러싼 팽팽한 긴장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으며 현대사 해석을 둘러싼 한 우리 내부의 갈등도 전운이 감돌고 있다고 표현 할 만큼 심각한 것인가?

 

역사를 안다고 미래를 예언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반면에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고 그 방향을 잘 못 읽었다가 미래를 그르치게 되는 예는 역사적으로 허다하게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역사는 어떤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역사 쓰기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 예컨대 혁명이나 민족 통일 등에 맞추어 수행해야 하며 역사 만들기는 역사 읽기에 따라 조정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19세기 유럽의 혁명을 유럽이 발전하는 대신에 망하고 있는 징조라고 잘못 해석했던 러시아 전제정권이 전자의 예를 보여 준다면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던 트로츠키 같은 반체제 지식인들이 후자의 본보기였다. 개항기의 우리 역사도 역사에 대한 인식부족이 어떤 참담한 결과를 낳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해방 전후 시기의 역사가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큰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미래가 아직도 불투명하다 함을 말해준다. 크게 볼 때 독일의 미래보다 일본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일본에서는 제대로 된 역사해석을 통한 역사청산이 이루어 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의식은 그 공동체가 지니는 정체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지배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양보 할 수 없는 치열한 전쟁이 역사교육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의식적으로 사실을 조작하는 것은 이미 지난 일로서의 역사의 진실을 밝힘으로써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되려는 역사일기 라기 보다는 국지적 목표를 지향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그리고 거짓에 기초한 모든 행위가 그렇듯이 그런 시도는 결국 파국을 몰고 온다. 그 보다 훨씬 미묘하고 난처한 경우가 발생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사실이 왜곡될 때이다. 그러한 무의식적 사실 왜곡을 낳게 되는 요인으로는 개인적 야심이나 공명심 뿐 아니라 강한 애국심이나 사회정의에 대한 갈구 등 자체로서는 나무라기 어려운 도덕적 동기들도 흔히 볼  수 있다. 뜨거운 애국적 열정이나 도덕적 분노가 때로는 사실과 상식에 기초한 냉정한 이성적 성찰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역사에서 배울 것을 제대로 못 배우고 그 때문에 역사적 비극을 되풀이 하는 악순환이 빚어지는 예를 흔히 본다. 강한 역사적 자의식을 가진 반면에 강대한 이웃들로부터 피해를 입온  경험이 많은 약소국가들 일수록 그런 유혹에 빠져들기가 쉽다는 것을 역사는 거듭 보여준다.

 

II.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는 우리가 편입되어 있었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무너지면서 시작되었다. 다른 세계를 모르고 살아왔던 우리는 세계사의 방향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없었다. 중국 중심, 유교적 질서중심의 세계를 고수하고자 하던 도덕적 “정통”세력은 외세에 편승하여 근대화를 이룩하고자 했던 개화파를 이단시 하는 비극적 분열이 지적 도덕적 엘리트층에서부터 기층 민중에 이르기까지 휩쓸었다. 망국으로 이어진 그 분열은 다시 맑스-레닌주의 또는 기독교에서 각기 자주독립을 위한 사상적 지지기반을 찾고자 하는 분열로 대치되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함으로서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던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광복을 쟁취하지 못했던 대가로 국토와 민족이 분단 점령되는 낭패를 감수해야 되었다.

 

적어도 일제 시대에는 누가 적인가에 대해서는 모호함이 없었다. 그러나 역사 읽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역사 만들기를 그르치는 악순환은 국토가 분단되는 순간부터  또다시 되풀이되기 시작했다. 일반 국민은 물론 민족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그 당시 세계사적 상황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극히 예외였다. 공산주의 소련에 대해서는 1917년의 혁명으로 태어난 소비에트 정권이 의도적으로 방출하는 선전물에 근거한 이상사회의 그림을 갖고 있었을 뿐 스탈린주의의 실상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고 미국, 영국 등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의 정체나 상황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도 극히 제한되었었다. 자주독립에 대한 욕구는 강했으나 점령세력을 설득시켜 그들로부터 현실적 지지를 이끌어 낼만한 정치적 지혜나 성숙도는 없었다. 일제 강점 이전 우리와 청국과의 관계도 사실은 완전 독립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상기할 만한 심리적 여유나 역사적 안목이 없었다. 미소 간에 본격화 되어가는 냉전 속에서 분단 점령은 한반도 내 두 개의 분단국가 수립이라는 국제정치적 현실로 고착되었고 우리에게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소련 측 사료들을 보면 북한을 자기들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하려는 스탈린의 계획은 북한 점령 초기부터 면밀하게 짜여있었음이 들어난다.

 

분단이 우리민족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횡포였음은 물론이지만 그 분단을 오늘날까지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자칫 또 다른 비극을 낳을 소지마저 아직도 품고 있는 더 큰 비극으로 격화시킨 것은 6.25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초기의 분단과는 달리 결코 피치 못할 일이 아니었으며 역사 읽기의 잘못이 낳은 의도적 도발이었다. 미소간의 세력대치가 팽팽한 가운데 김일성의 개인적 야망과 민족통일에 대한 강박관념의 배합으로 촉발된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인해 우리의 국토분단은 피를 낳은 민족분단으로 귀결되었으며 그 엄청난 후유증을 우리는 지금도 않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서 출발했던 패전국 독일의 상황이 우리와는 얼마나 다르게 전개되었는가를 보면 통일전쟁임을 주장하며 김일성이 스탈린을 몇 번씩 찾아가 설득시켜 시작한 동족상잔의 전쟁의 영향이 우리 민족의 운명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 수 있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남북은 독일처럼 체제는 다르더라도 적대적이지는 않게 공존하며 지금과 같은 큰 격차는 나지 않게 발전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특히 소련의 해체 이후로는 비적대적 통합의 현실적 가능성이 훨씬 빨리 나타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6.25 전쟁의 후유증은 사실 물리적 파괴에서 보다 정신적, 심리적 파괴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역사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이 봉쇄되었을 뿐 아니라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봉쇄되어버린 것이다. 북한에서는 이미 전쟁 전전부터 반공적 요소는 거의 다 축출되고 척결되었지만 남한에서는 많은 수의 친공 또는 친북으로 지목 당하는 사람들이나 애국 반공적 입장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물리적으로는 살아남았으나 정신적으로는 지하로 잠적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진정한 학문이나 토론의 가능성은 배제되었다. 반공이 설명이 필요 없는 절대명제가 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가 군사 쿠데타로 출발한 정권의 정당화에 초점이 맞추어 지도록 각색되어 버리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강단 사학자들은 현대사를 다루는 일을 기피했다. 우리 현대사에 대한 연구와 해석은 역사학자로서 진실을 가려내는 수련이 결여되었고 사상적, 정치적 의도에서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아니면 불행한 개인적 체험 때문에 공산진영에서 나온 선전물은 모두 진리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반체제 정치투사들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특히 광주민주화 운동이 유혈극으로 끝난 후부터는 반체제적 성격을 지지니 않은 역사나 사회과학 분야의 강의는 대학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지적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소련에서부터 비롯하여 세계 공산권이 붕괴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 말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이라는 해묵은 시비가 대학가를 휩쓸고 김일성 체제를 숭배하는 주사파가 공공연하게 기치를 내걸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지식인 사회가 우리 밖의 세계로부터 얼마나 유리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역사읽기가 현실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가를 잘 들어냈다. 우리의 반공교육은 너무도 맹목적으로 우매하게 추진되었기 공산주의 사회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감각을 통해 왜 공산주의를 반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터득하게 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고 역으로 역사적, 사회적 진실을 직면하기를 거부하는 심리구조를 형성시켰던 것이다.

 

잘못된 반공교육의 후유증과 그에 따른 비뚤어진 역사읽기는 “냉전의 종식”이라고 하는 세계사적 현상에 대한 전도된 대응에서 가장 극적으로 들어난다. 유럽에서 냉전이 끝났다는 말은 공산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간의 대치관계가 전자의 붕괴와 사상적 패배시인으로 끝났음을 의미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러시아가 그 것을 인정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길로 들어섰고 중국도 이름은 공산국가로 그대로 지키고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같은 현대화의 길을 선택함으로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좌파 지식인들의 경우는 냉전의 종식이란 혁명적 공산주의의 패배 인정을 전재로 하는 말임을 외면 한 채 오히려 역사적으로 파산을 선고 받은 혁명적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적 집착을 공공연하게 표방하는 데 필요한 지적 방탄조끼쯤으로 이용 하려 한다. 냉전이 끝났으니 냉전적 사고를 버리고 색깔 시비는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이 그 예다. 공산주의의 위협이 사라지고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으니 이제는 과거 억울하게 박해를 당했던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일을 서두르고 아직도 퇴행적 정치체제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북한의 동포들에게 대해 인도적 관심을 표명하며 평화적 공존과 궁극적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나가자는 것은 당연한 민족적 명제이다. 그러나 북한의 체제와 타협을 하자거나 심지어는 북한은 친일파 청산에 남한 보다 더 철저했기 때문에 대한민국보다 강한 민족정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그것은 역사를 퇴행 시킬 수 있는 무책임한 역사 거꾸로 읽기의 대표적 사례이다.

 

이미 실패한 국가, 실패한 체제로 진단받아 전 세계에 문제아로 떠오르고 있는 북한의 현 체제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 반대로 그와 대치관계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역사나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지도자들을 모두 폄훼하는 식의 역사해석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 것은 혁명적 사회주의에 대한 시대착오적 환상과 오도된 민족주의 때문이다. 분단극복이니 민족공조니 친일청산이니 등 민족을 절대시하는 듯 한 구호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자기가 몸담고 살아온 나라의 역사를 부정 일변도의 시각으로 해석하며 침략에 맞서 국민을 보호하며 폐허가 되었던 나라를 세계의 부러움을 사는 잘 사는 민주국가로 발전시켜온 지도자들 모두를 마치 민족의 적, 민중의 적이었던 양 매도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역사가의 임무는 일차적으로 현실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지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역할은 판사 보다는 검사와 변호사의 역할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김일성 부자의 공산주의를 표방한 세습독재체제의 역사를 바로 쓰고 읽는 일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쓰고 읽는 일과 똑 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자기가 몸담고 살아온 나라의 역사를 부정 일변도로 해석하고 국민을 먹여 살리지도 못하는 정권의 역사를 미화하는 것은 아무리 민족공조라는 이상을 내세운다 해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역사에 대한 침해이다. 현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하는 감정적 역사읽기는 민족 간의 평화적 공존이나 통일에도 결코 도움이 안 되는 환상이며  우리의 비극적 역사가 남겨놓은  병리적 현상일  뿐 일이다.

 

어느 개인이고 공동체고 지나온 길을 반추 할 때 아프고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집단적 역사 읽기의 목적이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희망적 방향으로 역사를 이끌어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면 비판이나 반성도 엄정한 사실 규명과 애정 어린 이해에 기초한 것이어야지 개인적 원한이나 증오에서 촉발된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더구나 살아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는 완벽성을 역사적 인물에게서 요구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오늘의 잣대로 과거의 행적을 평가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반(反) 역사적 처사이다. 불행히도 그런 자기비하 식의 역사읽기가 이미 30년 넘게 젊은이들 사이에서 전수되어 왔고 지금도 학교 교실에서 진행 중이다. 역사읽기를 바로 잡음으로서 역사 만들기를 바로 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때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