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사기』(史記) 이야기 - 01

  • 날짜
    2006-11-29 09: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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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이야기 - 01

국가의 흥망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國家興亡 匹夫有責)



“누가 나에게 그 많은 서적 중에서 두 권의 책을 집으라면 나는 단연코 『논어』와 『사기』를 택하겠습니다.”


중국에서 폭군을 대표하는 황제는 하(夏)나라 마지막 황제 걸(桀)과 은(殷)나라 마지막 황제 주(紂)를 일러 걸주로 통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서에는 언제나 왕조의 마지막 황제나 임금을 좋지 않게 기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새롭게 이룩되는 왕조의 정당성을 돋보이기 위해서는 망한 왕조의 마지막 책임자는 사실이건 아니던 역사의 허물을 뒤집어 써야하는 운명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기』에 있는 「은본기(殷本紀)」, 즉 은나라 역사에 나오는 마지막 권력자인 주 황제를 예로 들겠습니다. 주 황제는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말도 잘하고, 힘도 세고, 판단력도 빠르고 정확해서 참모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자만에 빠져 자기의 재능을 과시하며 천하에 명성을 드높이려 하였고, 모든 사람이 자기만 못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무겁게 거두어들여 궁성을 크게 늘이고 그 안에 원(苑)을 만들었습니다. 원이란 임금과 그 가족만을 위한 놀이터를 말하는데 그 크기는 오늘의 국립공원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속에 수많은 동물과 기화요초(琪花瑤草)를 기르게 하고 술로 연못을 만들어놓고 벌거벗은 남녀들이 음탕한 놀이를 하면서 밤새워 술과 노래로 지새며 놀았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고 말하면서 원한과 통분을 금치 못했으니 하늘인들 무심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말과 글로 형용할 수 없는 가혹한 포락형(炮烙刑) 등 고문하는 방법이 극심해지니 황실에는 충신과 현인은 다 떠나버리고, 나라를 좀 먹고 백성을 괴롭히는 간신배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황제의 형이자 충신인 비간(比干)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황제에게 충심어린 진언을 해야 한다며 쓴 소리를 계속 했습니다. 황제는 크게 진노하며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고 하면서 비간을 칼로 베어 심장을 꺼내는 잔인한 짓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포락형이란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아래 이글거리는 숯불을 피워 위를 걷게 하면 죄인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구리 기둥 위에서 펄쩍펄쩍 뛰다가 결국 미끄러져 불구덩이로 떨어져 죽는 형벌입니다. 황제와 그 참모들이 이를 보고 즐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나라가 망할 때는 외세보다는 먼저 안에 망할 원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지나친 과장이 아닐까?


주 황제는 백성의 뜻을 모아 일어나는 주(周) 나라 무왕(武王)에게 목야(牧野)에서 패배하여 자살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B.C.1600년에 성군 탕왕(湯王)이 세운 나라가 500년의 역사를 끝으로 사라지는 것이 한 사람의 잘못으로만 비롯된다면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며 역사를 승자의 편에서 너무도 편리하게 처리한 것으로도 느껴집니다.


은나라 폭군 주 황제가 죽고 무왕이 나라를 세우니 이름 하여 주(周) 왕조가 시작됩니다. 시기는 학자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B.C.1100년으로 추정합니다. 주나라는 9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전개하지만 실제로는 두 번씩이나 망한1) 나라이기도 합니다. 주나라는 지방분권 제도를 채택했는데, 이것은 그 시작부터 지방제후들이 세력을 강화해서 왕의 통치에 불복할 위험을 잉태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고 충성과 혈연으로 맺어진 끈이 점점 멀어지면서 제후들이 공모하여 왕을 살해하는 일이 생기는데,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수도인 호(鎬 : 오늘의 서안지역)을 벗어나 동쪽으로 천도하여 낙읍(洛邑 : 오늘의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해가 B.C.770년입니다.


이 해를 기점으로 해서 이전을 서주(西周) 그리고 그 후를 동주(東周)라고 하는데 이 시기를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B.C.221년까지 약 500년을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라고 합니다. 제가 앞서 주나라는 두 번 망한 나라였다고 했는데, 나라가 망하면 한 번만 망하는 것이지 두 번씩이나 망하다니 퍽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첫 번째는 무왕이 주나라를 창업하고 세월이 흘러 12대 유왕(幽王)이 즉위했다는데, 이 사람은 여자 때문에 망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자를 멀리한 권력자는 드물지만 유왕만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유왕은 후궁인 포사(襃姒)를 퍽 총애했습니다. 포사가 아들 백복(伯服)을 낳으니 왕후가 낳은  아들 태자 의구(宜臼)를 폐위시키고 이어서 포사를 왕후로 올리니 아무리 왕정시대라 하더라도 너무 심했다고 생각합니다. 『사기』에 보면 포사는 아름답기는 했지만 태생적으로 요물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진기하고 길어서 짧게 요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포사는 평소에 잘 웃지 않아 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녀를 웃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래도 별로 성과가 없었습니다. 유왕은 포사의 웃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천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변의 간신들은 유왕에게 여산(驪山)의 봉수를 올려 제후들을 놀려주자는 제안을 합니다.


유왕은 봉수(烽燧 : 옛날 변경에 높은 담을 쌓아 횃불을 들어 긴급사태를 알리는 것을 말하는데 낮에는 짐승들의 똥을 태워 불과 연기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봉이라 하고, 밤에는 횃불을 올려서 불을 보이게 했는데 이것을 수라 했다.)와 큰 북을 만들어 적이 쳐들어오면 봉화를 올리고 큰 북으로 소리를 내게 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봉화를 올리고 북을 크게 치니 많은 제후들이 유왕이 위험에 처한 줄 알고, 군인들을 이끌고 급히 왕도로 달려 왔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고, 그저 황제의 애첩 포사를 웃기고자 봉수를 올렸다니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더구나 이 광경을 보고 소리 내어 웃으며 즐거워하는 포사의 모습이 제후와 군인들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생각하면 기막힐 뿐입니다.


포사의 즐거운 웃음소리는 주나라의 장송곡이었지만 왕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왕은 포사의 즐거움을 보기 위해 계속해서 봉화를 올리고 북을 쳤으니 그 때마다 제후와 군인들은 급하게 달려왔고, 분노와 한숨만 지으며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한 편 딸이 왕후 자리에서 강제로 퇴위당하고 태자로 있던 외손자마저 쫓겨나니 불만에 차 있던 왕후의 친정아버지 신후(申候)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황제의 아내를 배출한 가문이니 본래부터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을 테고, 주위에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그는 민심이 이반하는 것을 확인하고 반기를 들어 한때 사위였던 유왕을 죽이고 또한 포사도 사로잡아 그 많은 재물을 압수했습니다.


혁명세력은 폐위되었던 태자 의구를 왕으로 모시니 이 사람이 곧 13대 평왕(平王)입니다. 평왕은 아버지인 유왕이 살해되고 정치적으로 어지러운 기존의 수도에서 낙읍으로 천도합니다. 이 사건은 동주의 시작이며 또한 중국역사의 대혼돈이자 변혁과 발전, 사상적 기틀을 마련하는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게 되는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기록으로만 보면 유왕은 마치 서양동화에 나오는 “늑대소년 이야기”와 유사한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현인은 쫓아내고 모두가 싫어하는 아첨배 괵석보(虢石父) 같은 사람을 중용했으니 유왕은 망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다 구비했다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유왕의 이야기는 왕실 내 권력투쟁으로도 볼 수 있어서 포사의 이야기는 지나친 허구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렇게 역사는 모든 책임을 한 사람에게 몰아세우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 근래 대통령을 비롯해서 장관, 국회의원, 재벌, 기업인, 법원, 검찰, 경찰, 시장, 도지사, 공무원, 시의원, 구의원, 군인, 노조, 시민단체 할 것 없이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교양 없는 말로 폄하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돋보이게 하는 민주주의인양 말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도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속에 나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지도자 한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에게 전했다는 휘호가 알려져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휘호에는 “국가의 흥망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國家興亡 匹夫有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6.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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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나라가 낙양으로 천도하는 것이 서주가 한 번 망한 것이고, 동주에서부터는 황제에게 실권이 사실상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권좌를 지킨 것에 불과하여 훗날 진나라에 병합되어 사라지니 이는 두 번째 망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