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관칼럼Chairmans's Column

삼황오제(三皇五帝) - 上

  • 날짜
    2007-02-26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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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관칼럼>

삼황오제(三皇五帝) - 上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우주창조와 인류문명의 기원을 중국식으로 설명하고자 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여덟 명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물론, 유교에서는 성천자(聖天子)라고 해서 실제 인물로 떠받들고, 중국의 역사학자들도 시간과 역사를 소급해서 그 들이 실제 살았다고 추정되는 곳을 찾아 흔적을 발굴하는데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삼황오제의 이름과 내용은 연구하는 사람마다, 사서(史書)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이들이 살았던 시대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중국 사람들도 제대로 정의내리지 못하고 제각각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민하던 가운데 중국 정부와 학자들은 삼황오제 다음으로 이어지는 나라, 다시 말해서 역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우 임금이 세운 하나라, 탕 임금이 새운 상나라, 문왕이 세운 주나라의 시대만이라도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통해 정리해보고자 했다. 수많은 학자들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첨단과학기술을 총동원하여 연구한 결과가 지난 2000년 11월 9일 신화통신을 통해 세계에 발표되었다.


내용은 “…유감스러운 것은 기존의 문헌을 통한 중국 고대의 기년(起年)이 단지 B.C. 841년으로 확정되어 그 이전의 역사 기년은 오랜 세월동안 파묻혀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의 역사 및 세계사에 중대한 결함이 아닐 수 없다. 세기가 교차하는 시기에 완성된 하상주연표는 중국 고대 기년 가운데 공백으로 남아있는 부분을 채우기 위한 끈질긴 노력의 결과이다. 그것은 중국 B.C. 841년 이전의 역사를 위해 일천이백 여년에 걸친 삼대의 연대에 하나의 틀을 세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연표에 따르면 중국 하나라 시대는 B.C. 2070년에 시작되었고, 하나라를 이어 상나라가 들어선 것은 B.C. 1600년 상나라를 이어 주나라가 등장한 것은 B.C. 1046년이다. … ” 이렇게 역사와 연대를 뒤늦게나마 새롭게 정의하려는 중국의 노력은 우리도 주시해보아야 할 일이다.


이것은 중국 역사학자들만의 공로가 아니라 중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세계 여러 석학들의 공로가 컸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각 나라의 학자들도 대체로 중국의 연구 결과를 수긍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금년이 단기 4330년이다. 중국의 발표를 살펴보면 우리 역사가 중국보다 230년이나 앞섰다는 결과가 된다. 우리 역사가 중국보다 많이 앞섰다고 해서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그보다 4330년에 이르는 우리의 장구한 역사를 이제라도 과학적으로 정확히 검증해보야 할 시기가 지금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국의 공식적 입장은 우왕이 하나라를 세우기 이전(BC2070)인 삼황오제의 시대를 전설의 시대로 인정한다. 하지만 『사기』에서는 오제(황제, 전욱, 제곡, 요, 순)만을 인정하고, 삼황(여와, 복희, 신농)은 거론하지 않는다. 또한 『논어』에서는 요, 순 임금의 이름은 보이지만 나머지 임금들은 거론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공자의 『논어』 「술이」편에 보이는 불어괴력난신(不語怪力亂神)의 영향 때문이리라. 공자는 이치에 맞지 않고,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상식에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는 말씀을 삼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온 이유 중 하나는 실용성이 적은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한 중국 민족성에도 기인된 것이라 생각한다.


작년 가을 새얼문화재단의 회원 30여분과 상해박물관을 거쳐 둔황, 투루판, 쿠얼러, 쿠처, 우루무치 등 속칭 실크로드의 깊은 오지까지 답사한 것이 지금도 새롭다. 앞에서 열거한 오아시스 중에서 투루판(吐魯蕃)은 해발보다 150미터 낮은 분지인데 백여 종이 넘는 포도가 춤을 추고 있었다. 『대당서역기』의 저자 현장이 인도로 가기 위해 머문 곳이고, 『서유기』의 화염산이 있어 손오공의 이름이 지금도 회자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A.D. 640년까지 불교를 신봉하는 독립국가 고창국(高昌國)이 있었으나 당의 침략으로 독립을 잃고 서주(西州)로 개칭되었다. 안록산의 난(755년)으로 당이 허약해지면서 중앙아시아에서 철수하기 까지 이 지역은 100여 년 동안 동서무역의 중심지이자, 이국풍속이 분쟁 없이 새로운 문화로 결실을 맺은 곳이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북경시의 팔달령(八達嶺)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산해관(山海關), 진황도(秦黃島)에 이르는 그 거대한 길이로 명성이 높지만 기본적으로 만리장성은 한족과 이민족과의 국경이며 전선(戰線)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칼징(坎兒井)은 생명과 생산의 수로(水路)로 이어지는 지하 실개천이 장장 5,000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주변 고원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오는 물이 지상으로 흐르면 사막의 열기로 인해 증발하므로 수량이 줄어든다. 대지의 열기로 인해 물이 증발하는 것을 막고, 먼 지역까지 생명의 젖줄을 연장하기 위해 이곳 사람들은 낮게는 지하 10미터, 깊게는 50미터까지 땅을 파내어 물이 흐르도록 했다. 이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경이로움과 인간승리를 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오래도록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역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옛날 고창국 사람들이 묻혀있는 공동묘지 아스타나(阿斯塔那) 고분군이다. 고분 입구에는 여와와 복희가 얼굴은 서역사람, 몸은 용으로 새겨져 서로 교미하는 조각이 서 있다. 투루판의 주민들에게는 특이한 장례습속이 있었는데, 죽은 사람을 종이로 된 장화, 모자, 허리띠, 신발 등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오아시스에는 종이가 귀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장례의상을 만들기 위해 공문서나 계약서 또는 다른 문서들을 재활용해서 써야했다.


거의 2,000종의 문서가 아스타나 묘지의 205개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을 학자들이 해독하여 실크로드의 행로, 습관, 생활방식 등을 알아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집트는 죽은 이를 미이라로 만드는 풍속이 있었지만, 열사의 나라 투루판에서는 매장하면 그대로 미이라가 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종이로 의상을 만들어 시신을  입히고,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을 그 위에 여와와 복희를 그린 비단으로 덮는 습속이 있는데, 이 그림을 인면용신도(人面龍神圖)라고 한다. 머리 위에는 해가 있고, 꼬리 부분에는 달이 있고, 나머지 부분에는 별이 가득히 그려져 있다.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삼황이고, 그 자손이 오제가 되어서 존엄한 신성의 법통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삼황은 앞에서 설명한 여와, 복희, 신농이다. 여와는 본래 독립된 여신으로 인류를 흙으로 창조하였으니 대모신(大母神)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 발간된 책들에는 여와가 지상을 다스리는 신, 고비(高比)의 여와와 복희 남매로 변신되어 나타난다. 이들 남매는 대홍수로 인류가 전멸하고 둘만 살아남게 되자 하는 수 없이 둘이 결혼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화학에서 말하는 홍수남매혼형(洪水男妹婚型)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의 신화는 동서를 막론하고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곳곳마다 전해지고 있는 설화이기도 하다.


복희도 원래는 독립된 신으로 사람들에게 끈으로 그물을 짜서 고기 잡는 방법과 날짐승을 포획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가장 큰 업적은 팔괘를 창안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농업시대 이전 수렵시대를 총괄하던 신이었거나 하늘과 땅 그리고 삼라만상에 기도하는 제사장의 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농은 가장 인간적인 신이다. 농업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식량과 치료를 위해 풀을 직접 씹어서 맛을 보았는데 종종 독초에 중독되어 생명을 잃을 뻔 했다. 결국 단장초(斷腸草)라는 풀을 맛보다가 창자가 끊어져 죽었다고 하는데, 최초로 시장을 개설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지만 자기 후배인 황제(皇帝)에게 권리를 빼앗긴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동양에서는 신과 인간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위와 같이 설명하고 나면 삼황을 인격화한다고 해도 신석기 시대에 있을 수 있는 군장이나 무당 그리고 그 부락의 힘 있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삼황을 취급하지 않는 것을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다.


<2007. 1. 8.>